보기 좋은 몸을 만들라는 강권에 주체가 농락당한다는 분석은 반동적 체념이다. 획일화된 미적 기준일지라도 얼마간의 기능은 발휘하는데, 그것을 충족하려는 무지성적 몸부림이 미학적 몸에 대한 이해를 다소나마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진보는 그러한 몸부림을 지성적 운동으로 인도해 자기 몸-삶에 최적인 미학을 스스로 세우게 하는 것에 있다.
몸에 대한 무언의 사회적 압박에 대한 저항으로 꾸중을 듣는 것은 말초적 미디어로 대변되는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는 주체다. 이때 애써 무시되는 것은 타자의 인식을 고려해 자기에게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이 사회적 동물의 고등한 기능이라는 지당한 진리다. 몸의 겉모습보다는 몸의 기능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의 모순은 여기서 드러난다. 타자의 시선에서 탈주하려는 노력은 눈이 너무 부셔서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우행과 닮았다. 만약 그 노력이 성공한다면 주체는 해방되지 못하고 외려 불구가 될 것이다.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헬스산업 세력은 연약한 주체를 조종하는 또 다른 주범으로 몰린다. 운동을 파는 사람은 꾀 많은 사업가로, 그들에게 현혹된 주체는 멍하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 순진한 소비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진정한 능력은 그러한 영악함에 있지 않고, 그것을 비판하는 세력마저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포섭한다는 데에 있다. 비평가들은 헬스산업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노출시키며 문화산업 이윤의 극대화를 노린다.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두 산업이 점유율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