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오래된 격언은 뒤집혀서 새로운 평가를 받는다.
“이웃에 대한 너희의 사랑은 너희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사랑이다.”
“너희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사랑이 너희의 고독을 일종의 감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이자, 상승을 위한 최적의 시간인 고독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이웃에게 달아난다.”
포기된 고독은 쉽게 이웃 사랑으로 대체된다.
“‘너’는 ‘나’보다 연조가 깊다. 너는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웃에게 몰려가는 것이다.”
이웃은 이용된다. 한 가지 유용한 이용 방식은 이웃을 성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참고 견뎌내지 못하며 너희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 이웃을 유혹하여 사랑하도록 만들고는 그들의 과오로써 너희 자신을 미화하려 드는 것이다.”
그다음 이웃을 성인의 자리에서 추락시키면 간단하게 자기 자신을 미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증거 조작에 활용되기도 한다.
“너희 자신을 예찬하려 할 때 너희는 증인을 끌어들인다. 너희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그 증인을 유도하고 나서 너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증거를 조작하는 행위는 쉽게 인식되지 않지만 조작된 증거로 내려진 판결은 의식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기 자신을 쉽게 속이는 데에 이웃이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다.
“나 너희가 벌이는 축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많은 배우들을 보게 된 데다 구경꾼조차 자주 배우라도 된 양 거동하고 있었으니.”
이웃사랑을 미덕으로 삼은 사람들은 모여 축제를 벌이기를 좋아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주어 각자가 스스로를 속이는 데에 편하기 때문이다.
“나 이제 너희가 온갖 부류의 이웃과 그 이웃의 이웃을 참고 견뎌내지 못했으면 하고 소망하노라. 너희는 그렇게 너희 자신으로부터 벗과 넘쳐오르는 심장을 만들어내야 한다.”
니체는 이웃에 대한 동정과 연민, 선망과 예찬에서 관심을 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 것에 중독되는 일은 왜소해져 가는 자신을 감추고 미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대신 니체는 우리가 상승을 위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벗을 찾기를, 도래할 위버멘쉬를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다.
“형제들이여, 나 너희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권하지 않노라. 나 너희에게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권하노라.”
책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
원제: Also sprach Zarathustra (1885)
방송
김준산 외, 〈니체 강독 3편〉, 《두 남자의 철학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