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은 나훔서 3장 6절 말씀으로 시작한다.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I will cast abominable filth at you, make you vile, and make you a spectacle)”
다만 여기서 스펙터클(spectacle)이 되는 것은 누구인가?
<놉>에서 등장하는 미확인비행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는 흘러가지 않는 구름 속에 서식하고 하늘을 누비며, 눈을 마주친 먹잇감은 무자비한 회오리바람으로 빨아먹는 생물체다. 성이 나면 거대한 몸을 펼쳐 해파리처럼 나풀대는데, 입과 항문의 구분이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형태로의 변신이라 할 수 있다. 해파리 모드에서 드러나는 네모나고 반짝이는 녹색 눈은 카메라 센서를 똑 닮았다. 이 스펙터클한 크리쳐를 OJ는 자신이 훈련시켰던 말의 이름을 따 진 재킷(Jean Jacket)이라 명명한다. 영화의 첫 장 ‘NOPE’이 시작되면 카메라 시점은 진 재킷의 눈을 천천히 통과해 들어간다.
영화에서 진 재킷의 이름은 하나가 아니다. 주프는 진 재킷을 뷰어(Viewer)라고 명명한다. 아역배우 시절 겪은 비극적 사건에서 혼자 온전히 살아남은 경험은 주프가 스스로를 선택받은 존재라고 여기게끔 만들었고, 그는 뷰어가 모든 인간들을 저 위에서 감시하는 와중에 자신과는 특별한 소통을 한다고 착각한다. 그것을 이용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라이브 쇼를 기획하지만,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뷰어의 내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한편 뷰어를 진 재킷이라고 부르는 OJ는 동생 에메랄드와 기술자 엔젤, 촬영감독 홀스트와 함께 팀을 꾸리고, 진 재킷을 유인하여 촬영할 계획을 세운다. 진 재킷의 주변 전자 기기들을 다운시키는 능력과 바라보지 않으면 흡입하지 않는 습성, 그리고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깃발 달린 말을 피할 것이라는 추론에 기반한 그들의 기획은 거의 성공에 근접한다. 그들이 연출한 식사 테이블에 입장한 진 재킷은 그대로 수동 카메라에 포착되고 만다. 그러나 홀스트가 진 재킷의 섭식 활동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과욕을 부리고, 그들의 도발에 화가 난 진 재킷은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눈을 드러내며 몸을 활짝 펼친다. 진 재킷은 세상 전부를 삼켜버릴 것 같은 기세로 OJ를 쫓는다. 그 사이 에메랄드는 주피터 파크로 몸을 피하고, 커다란 꼬마 보안관 풍선으로 진 재킷을 유인하여 진 재킷의 실체를 우물 카메라로 찍어낸다. 풍선이 진 재킷의 내장 안에서 터지면서 광포한 사건은 일단락되고, ‘저 너머(OUT YONDER)’에 있는 OJ를 비추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진 재킷의 정체를 카메라에 담아 부와 명예를 얻거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고생 끝에 주인공들이 승리한다는 단순한 서사를 넘어 스펙터클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일단 OJ 팀과 주프의 최종 목표인 진 재킷은 분명 스펙터클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리는 스펙터클의 의미는 거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상술한 것처럼 관객의 시선이 진 재킷의 눈을 통과하며 영화가 시작한다는 점,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 OJ가 ‘저 너머’에 서있다는 점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을 진 재킷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영화의 ‘외계’에 있는 관객은 진 재킷의 눈을 통해 영화로 들어갔다가 OJ를 그 세계에 두고 빠져나오는 것이다. 진 재킷의 또 다른 이름처럼 관객은 영화를 바라보는 뷰어이다. 이렇게 영화는 관객을 스펙터클로 만든다.
OJ 팀과 주프는 영화를 만드는 모든 이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기획하고 연출하며, 촬영하고 연기한다. 사람들은 관객들이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에 눈을 빼앗긴다고 생각하지만, 익명의 관객이라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희구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그들은 주프처럼 관객들에게 선택받기를 원하고, 엔젤과 홀스트처럼 관객들의 실체와 행위에 집착하기도 하며, 때로는 에메랄드처럼 관객들을 이용해 떼돈을 벌 생각에 미혹되기도 한다. 그들이 스펙터클에 과하게 취하면 스펙터클은 그들을 삼켜 제멋대로 소비하고는 찌꺼기를 아무렇게나 뱉어낼 것이다. 주프가 무참히 사냥당한 것을 보면 스펙터클은 길들이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주프와 다르게 OJ는 살아남는데, 그것은 OJ가 스펙터클을 부르는 방법뿐만 아니라 밀어내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움직이는 말(The Horse in Motion)’을 탄생시킨 기수에 예를 표할 만큼 조던 필 감독은 영화산업에 헌신한 이들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스펙터클을 쫓는 영화인들의 맹목성을 힐난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외려 그들이 그들의 스펙터클에게서 느끼는 공포를 스펙터클한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펙터클은 스펙터클이기에 그것에 완전히 무관심한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스펙터클의 폭압적 실체를 밝히고, 그것에 휘둘리는 영화인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감독은 OJ가 그러했듯 스펙터클을 너무 쳐다보지도, 너무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OJ와 에메랄드처럼 서로를 지켜봐 주는 영화인들끼리 연대하는 것이 스펙터클에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는 법이라고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도르노의 말에 따르면 진보에는 자유의 잠재력과 억압의 현실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이중적인 성격이 있다. 기술적 진보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영화로 구현하고 그것을 전 세계에 빠르게 유통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시선을 마주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소비하는 관객-스펙터클을 주조해내었다. 영화산업이라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더 크고 강한 스펙터클의 먹잇감이 된 것이다. 첨단의 카메라에서 불가능하던 ‘오프라 샷’을 구식의 우물 카메라로 성공한 것에는 그러한 진보의 회귀를 통해서라도 스펙터클의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감독의 바람이 담겨있는 듯하다.
주피터 파크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이 알려주듯이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 저 너머에 서있는 OJ를 뒤로한 채 발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조던 필 감독의 영화를 보러 다시금 영화관을 방문하고 그를 소비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 재킷이 정말 죽은 것인지 의심해본다. 어쩌면 그저 기절했던 것이고 곧 깨어나 더 거대하게 몸을 펼치고 그들에게 달려들지 모른다. 풍선이 터지자 난폭해진 ‘고디’처럼. 기 드보르의 말을 빌리며 글을 맺는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안식처를 발견할 수 없다. 스펙터클이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