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붕괴에 대하여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by 소골


해준이 자신이 언제 사랑한다고 했냐고 서래에게 따진다. 그의 당혹스러운 감정은 스크린 밖으로 번진다. 아무리 복기해도 그가 사랑한다고 말한 장면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헤어질 결심>은 숨김없이 묻고 있다. 서래가 읽어낸, 해준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서래는 해준을 만나기 전과 후, 두 사람의 남편을 둔다. 그들은 사랑을 전혀 다른 것으로 착각한 남자들이다. 전자인 기도수는 사랑은 곧 소유라 여기는 억압적 인물이며, 후자인 임호신은 ‘사랑해’라고 말하면 다 사랑인 줄 아는 부박한 사람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서래는 그들과 다르다. 서래에게 사랑은, 해준의 고백이 담긴 파일 이름처럼, ‘무너지고 깨어짐’이다.



죽은 자의 시선에서


해준은 강력계 형사이다. 그는 미결 사건에 집착하며 만성적인 불면증을 앓고 있다. 당연하지만 불면증은 서래가 장난스럽게 말한 것처럼 피 흘리는 사진들이 비명을 질러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증상은 그의 실존적 기투를 드러낸다. 해준은 단순히 범인을 잡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형사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살인 사건에 자기 존재 전체를 걸어버리는 인간이다. 그는 사자(死者)의 복수를 수행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다. 사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 그것이 그의 실존을 규정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허무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살인 사건이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해준이 그의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그는 피해자의 살아있던 눈이 마지막으로 봤을 살인자를 똑바로 보기 위해 죽어있는 눈으로 접속해 들어간다.


‘눈을 감는다’는 표현이 ‘죽는다’의 은유로 사용되곤 하지만 사실 죽은 사람은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기도수의 죽어버린 눈 위를 무심히 기어가는 개미들은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오직 살아있는 사람만이 눈을 뜨고 있기 위해 눈을 감아야 한다. 비금봉 정상을 올려다보는 기도수의 시점 숏은 그의 눈에 인입된 해준의 시선을 담아낸다. 눈을 감지 않는 기도수의 눈을 견디기 위해서, 그는 눈에 눈물을 넣는다.


죽은 자에게로의 접속은 눈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더욱 심화된다. 해준은 기도수를 따라 카발란 위스키를 마셔보고, 말러의 교향곡을 듣는다. 서래가 기도수를 죽인 진범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죽은 자와의 동화를 멈춰주진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두 번째 살인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해준이 임호신의 사체를 마주친 순간, 카메라는 임호신의 비딱한 시선에 인입된 해준의 시선을 담아내고, 임호신의 손 꺾는 버릇은 해준에게 전이된다. 해준은 다시 눈에 눈물을 넣는다.


해준은 이렇게 죽은 자가 되어보고 심지어 그것에 종속된다. 해준은 그런 것을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한다. 의식적으로 죽은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형사가 갖춰야 할 자질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해준을 ‘최연소 경감’ 타이틀의 유능한 형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마저 죽은 자에게 침잠해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죽음이 해준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따로 떼어낼 수 없게 된다. 그가 지옥 같은 불면을 앓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죽은 자는 잠을 잘 필요가 없기에 그도 잠들 수 없는 것이다. 해준은 그렇게 사자와 산 자의 경계에 외롭게 서있다.



왜곡되는 시선


이런 해준의 세계에 서래가 틈입해 들어온다. 서래는 꼼꼼한 지략가이지만 상황에 맞춰 자신의 감정마저 속이는 기회주의자는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기도수의 죽음에 놀라고 애도하는 모습을 경찰에게 보여주었을 것이고, 해준은 서래를 꼿꼿하다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준의 신문이 시작되고, 서래는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기도수의 시신을 응시한다. 죽음을 감각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서래가 해준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녀는 죽음 가까이 서 있는 해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해준은 멀찌가니 떨어져 서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서래가 범인이다’라는 가설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 위한 의심의 시선이다. 그러나 해준의 쌍안경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그 가설을 반박한다. 서래는 사글사글 노인 돌볼 뿐만 아니라 앵무새와 물고기 같은 작은 생명까지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서래의 일상적인 모습은 남편의 죽음에도 순간순간 웃음기를 내비치던 신문실에서의 모습과 대비되며 의심에서 관심으로의 이행을 가속한다.


잠복 수사의 시선은 점점 은밀해진다. 이슥한 밤, 해준은 수사를 명분으로 서래의 집을 밀탐한다. 쌍안경으로는 부족해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까지 대동한 그의 모습은 스토커로 오해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음험한 기운마저 풍긴다. 해준은 서래가 밥으로 무얼 먹고, 티브이로는 무얼 보고 어떻게 자는지 살피고 그것을 스마트 워치에 기록한다. 서래를 실컷 관찰하고 나면 해준은 편하게 잠드는데, 잠복해서 잠 부족이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잠복하는 거라는 그의 주장은 서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우는구나. 마침내.”


서래의 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다의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산맥의 봉우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벽지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유명한 ‘토끼와 오리’ 그림을 연상케 한다. 사람은 이 그림을 관점에 따라 토끼로도 인식할 수 있고 오리로도 인식할 수 있지만 토끼임을 인식하면서 정확히 동시에 오리로 인식할 수는 없다. 해준에게 서래는 ‘토끼와 오리’ 그림 같았을 것이다. 서래를 용의자로 의심하면서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해준은 서래의 웃음을 울음으로 오인하는 편향적 지각을 저지른다. 서래가 남편의 죽음에 너무나도 무덤덤하다는 것은 서래가 의심받는 심증 중 하나였는데, 시선의 왜곡을 통해 그것을 무효화한 것이다.


해준의 왜곡된 시선은 의심과 관심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해준은 수완으로부터 서래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보고를 받지만, 그가 서래에게 건네는 말은 더 이상 취조를 위한 질문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처음만 어렵기에 이것은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보내는 문자에는 물음표가 없다. 그것은 서래를 찾아갈 구실이 될 뿐이다.


해준은 결국 보상을 받는다. 서래는 해준에게 호흡을 맞추고 깊은 잠으로 그를 인도한다. 잠을 자는 것이 살아있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이라면 서래는 죽음의 경계에서 서있는 해준을 살아있는 삶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래는 그를 잠시나마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준의 왜곡된 시선에 말미암아 가능했던 행복은 왜곡할 수 없는 증거의 등장으로 그를 다시 수렁으로 빠뜨린다.



해준의 붕괴


서래의 마음에 들고픈 해준은 그녀를 대신해 그녀가 간병하는 월요일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 그는 유능한 형사라,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치매의 기미를 읽어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기도수의 사망일에 할머니의 스마트폰이 138층 높이의 고도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사자의 명령은 다시 지배력을 되찾는다. 그는 기도수가 등반했던 길을 되밟았듯 이번엔 서래가 그날 거쳤을 길을 다시 차근히 밟아나간다. 비금봉 정상에서 스마트폰은 다시 138층을 가리킨다. 기도수가 사망한 날 서래가 비금봉을 올랐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물증은 모든 심증을 뒤집어 놓는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해준은 더 이상 왜곡된 시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오인할 수 없는 증거는 그를 선택의 갈림길로 끌고 간다.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래를 감옥에 보내야 하고, 자신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 영화는 이후 해준의 고뇌하는 모습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는 고심 없이 헤어질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전구가 끔뻑거리듯 빠른 속도로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다. 해준은 서래에게 자신의 붕괴를 고백한다.


그가 말한 붕괴는 경찰로서의 자부심의 붕괴이다. 서래는 여기서 사랑을 읽어낸다. 그러나 해준이 그의 말처럼 완전히 붕괴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경찰로서의 자부심은 그가 살인 사건에 기투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생산물이다. 서래의 사건을 덮으면서 그의 자부심이 순간 타격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그는 살인 사건에 대한 애착은 결코 놓지 않는다. 이포에서 해준이 시들시들한 것은 서래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살인 사건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이포에서의 첫 살인 사건 현장에 들어가는 그의 힘찬 발걸음은 이를 방증한다. 그가 자신이 추구하여온 삶의 최고 가치를 서래를 위해 완전히 포기했다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도주한다. 붕괴를 컨트롤하는 그의 아내 정안에게로.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서래가 기도수의 살해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서래가 해준에게 했던 모든 행동은 의심스러워진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해준을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서래의 진심은 해준을 향한 그녀의 관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서래가 서에서 신문을 받는 도중, 질곡동 사건의 용의자 이지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해준이 급히 출동하는 장면이 있다. 서래는 그런 해준을 뒤쫓아 가는데, 이때 해준의 추격씬은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섰던 서래의 외조부 계봉석에 대한 미지의 브리핑과 포개진다. 이러한 연출은 서래가 외조부의 용맹함을 이지구를 제압하는 해준의 모습에 투영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로 인해 서래에게 해준은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되고, 그의 시선은 수사망을 좁혀오는 시선이 아닌 지켜주는 시선이 되었을 것이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해준의 고백으로 서래는 자신의 사랑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장 이포로 떠났으므로 서래는 자신의 사랑이 시작되자마자 외톨이가 되어버린 꼴이 된다.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어떻게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은 까마귀 깃털보다 가벼운 사랑 표현을 남발하는 나루한 자이다. 서래를 잔드근히 바라보는 해준과 다르게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에만 관심 있는 나르시시스트이며, 재떨이를 들어주는 싶은 마음은 고사하고 실내 흡연에 역정을 내는 속 좁은 남자다. 그런 사람이 사랑받고 싶은 서래의 욕구를 채워줄 리 만무하다. 빚쟁이 사철성이 아니었어도 서래는 안개 가득한 이포로 도망간 해준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준이 서래에게 다가온 방식 그대로, 이번에는 서래가 이포의 해준에게 다가간다. 서래는 멀찌가니 떨어져 해준에게 관심의 시선을 던진다. 화재경보를 울려 중정에 경찰들을 한데 모으는 솜씨는 해준이 서래를 보기 위해 온갖 명분을 만들어내던 솜씨와 닮았다. 쌍안경과 카메라는 없지만 그녀의 눈은 해준이 운동화를 신었는지 구두를 신었는지, 면도는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 같은 디테일을 잡아내고,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스마트 워치에 기록된다. 그리고 해준이 법을 어기며 그녀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살인으로 그를 지켜준다.



바라는 대로


서래는 왜 임호신을 직접 죽이지 않았을까? 완력이 안 되더라도 그녀에게는 펜타닐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약을 쓴다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서래는 펜타닐을 사철성의 노모에게 먹인다. 노모의 병과 죽음을 임호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철성을 이용해 임호신을 살해한 것이다. 이렇게 우회한 것은 서래의 독특한 살인 패턴 때문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녀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바란 방식대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패턴은 서래의 어머니에서부터 기도수를 거쳐 사철성의 노모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반복된다. 서래의 어머니와 사철성의 어머니는 병마의 고통 속에서 평온한 죽음을 바랐고, 서래는 그들이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게 도왔다. 물론 기도수 자신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망한 때는 비금봉 정상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에 ‘죽어도 좋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말이 기도수의 진심이었든 아니면 단순한 비유였든 간에 최소한 서래는 기도수를 살해할 때 그의 의견을 그녀의 방식대로 받아들여준 것이다. 요컨대 서래의 살인 방식에는 상대의 바람이 반영된다.


그렇게 영화는 살인범 서래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다소간 희미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사랑하거나, 사랑했거나, 최소한 연민을 가진 대상에 대한 서래의 살인은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형식적으로나마 서래가 그들의 부탁, 혹은 바람을 이루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서사는 살인을 미화하기 위함이 조금도 아니며, 서래의 마지막 살인 방식과도 관계된 그녀의 일관된 행동 패턴을 보여줄 따름이다. 서래가 네 번째 살인, 즉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 스스로 구덩이에 들어갈 때, 영화는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 해준의 고백이 담긴 녹음을 되뇌는 서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그녀는 자신을 깊은 데 빠트리고 아무도 못 찾게 하는 방식으로 죽음으로써, 해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서래의 붕괴


서래는 왜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서래가 이포로 온 이유에서 출발해야 한다. 서래는 해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포로 왔다. 임호신 사망 사건이 급작스럽게 벌어졌어도 해준의 마음을 확인하고 되살리고픈 서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해준이 이번에도 자신이 직접 살인을 저질렀다고 단정하진 않을지 염려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희망을 품기도 한다.


“답을 말해야 하나. 아냐. 이미 그는 알고 있을지도 몰라. 묻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나 서래의 기대는 단박에 부서진다. 이포에서의 해준은 무언가 변해있다. 부산에서와 다르게 그는 앞뒤를 조리 있게 살펴보지도 않은 채 서래를 무작정 추궁하고, 신문실에선 고급 도시락 대신 핫도그가 나온다. 해준은 서래를 더 이상 남편을 잃은 불쌍한 여자가 아닌 공교로운 사건으로 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불편한 여자로 인식한다. 차돌같이 단단한 해준의 태도에 그의 마음을 되찾을 방법이 요원해 보이고, 서래의 상심은 깊어만 간다.


서래는 안개가 없는, 그래서 진실을 가리는 모호함이 없어야 하는 호미산에서 마지막 희망을 걸었을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해준의 얼굴을 비추는 헤드 랜턴의 눈부신 빛은 그의 진심을 갈구하는 서래의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혹여나 부족한 한국말에 의미가 퇴색될까 중국어로 자신의 말을 전달하고, 흩날리는 눈처럼 미묘하게 떨리는 눈빛에 애절한 마음을 담는다. 그래나 해준은 꼿꼿하다. 해준은 지난 402일 동안 서래를 얼마나, 어떻게 그리워했을까? 정안이 16년 8개월 동안 해준을 대한 방식으로 서래를 대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해준의 말처럼 그가 경찰이고 서래가 피의자란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준의 사랑은 이미 변해버렸다. 서래가 아직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인 어머니의 유골이 해준의 손에 의해 계봉석 장군의 산에 뿌려지고, 서래는 자유로워진다.


어떻게 하면 사랑이 이미 끝나버린 사람이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마 서래는 자신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붕괴되었다는 해준의 고백으로 자신이 사랑을 깨달은 순간을 말이다. 서래에게 붕괴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은 존재의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 가치체계의 완전한 전복을, 다시 말해 붕괴를 요구한다. 사랑은 ‘그 외 다른 모든 것의 포기’이기에, 자신의 독재를 원한다. 제일 우선되었던 가치, 그러니까 이전에 가장 사랑했던 가치가 있었다면 그것은 새로 시작하는 사랑과 공존할 수 없다. 한쪽의 붕괴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붕괴는 사랑에 필연적이다. 서래는 이러한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해준이 말한 ‘붕괴’라는 단어가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것을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붕괴를 기획한다. 그 붕괴는 밀항하는 배의 생선 창고에서 오물을 뒤집어쓰면서도, 기도수로부터 온갖 폭행과 수모를 당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지켜낸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의 붕괴여야 한다. 해준이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들 완벽한 고백이자 자신의 완전한 붕괴를 위해, 서래는 자기 자신을 바다에 빠트린다.



붕괴를 넘어서


‘완전 안전’한 원자력 발전의 도시 이포가 영화 후반부의 주무대가 된 것은 단순히 압운을 활용한 유머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붕괴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원자력 발전에서 우라늄 붕괴는 다른 우라늄을 붕괴시키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해준의 붕괴가 서래의 붕괴를 초래한 것처럼. 우라늄 붕괴가 막대한 에너지를 발하는 것처럼, 붕괴를 극복한 사랑은 삶의 강력한 동력원이 될 수 있다. 다행히 사랑은 강력한 에너지만 만들어낼 뿐, 수십만 년을 묻어둬야 하는 폐기물을 남기진 않는다.


이 영화는 밝고 명랑하게 포장된 사랑이 아니라 파괴적이지만 강렬한 사랑의 진정한 모습을 그린다.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을 붕괴시켜야만 가능하다. 때로 그것을 감당하기는 매우 어려워서 현대인치고 품격 있는 해준도, 지혜로운 서래에게도 버겁다. <헤어질 결심>은 당신은 어떠하냐고 묻는 듯하다. 얼마큼 사랑에 용맹할 수 있느냐고. 우리는 속 편하게 사랑을 좋아하는 마음의 느슨한 연장쯤으로 여기거나, 찰나의 쾌락만을 추구하며 진정한 사랑을 외면할 수도 있다. 사랑이 철저한 붕괴를 요구하고, 그래서 삶을 처절하게 만든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산오의 입을 빌려 이러한 태도에 반대하고 있다.


“나 너 때문에 고생 꽤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공허한 것이라고. 선택지는 붕괴에서 도망가거나 붕괴를 견디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 결심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중단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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