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아름답기만 하면 안 될까?

by sogongnyeon

2019년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장을 열어보았어요. 액기스 기록만 가득한 일기장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덧붙여봅니다. 3년만에 만난 또 다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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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빨래를 걷으려고 하늘을 봤다. 호에 이게 진짜 무슨일이냐. 생각지못한 별밭이 굿모닝이라고 인사해줬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아 근데 나 어떻게 가냐. 걱정이 따라 붙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나가서 걷는건 좀 무섭지 않나. 발목을 돌리고 어깨를 풀고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스트레칭 하면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다른 순례자들도 하나 둘씩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제일 처음으로 나가게 됐다. 나가자마자 바로는 아무도 없어서 무섭다가도 가로등 불빛 아래 빛나고 있는 노란 화살표를 보니 든든했다. 첫 날이었다면 어두운 세상에 엄두도 못 냈을 것 같은데 화살표에 의지하는 시간이 쪼오금 늘었다고 혼자 가까워졌나 보다. 달빛 아래 걷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었는데 가로등 색은 왜 또 다 주황색이라서 내 마음이 이리도 몽글몽글 해지는지. 모두가 잠든 세상을 걷다보니 괜히 이 세상 내꺼인 것 같아서 또 신나버렸다.


걷다가 몇 걸음 못 가서 멈춰버렸다. 이건 뭐 가지말라는거 아닌가. 어쩌자는거지. 고개를 돌리면 해가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새까만 색이던 하늘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남색, 보라색, 주황색,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으로 바꼈다. 하늘은 이 옷 저 옷을 입어댔고 그 때마다 내 걸음은 멈췄다. 하늘쪽으로 달려보기도 하고 아리랑 춤사위로 춤을 추기도 하고 그저 바라만 보기도 했다. 일출 하나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너무 행복해서 소름이 끼치고 가슴 한구석이 쩌릿하게 벼락 맞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 빼놓고 즐기다보니 길을 또 잃어버렸다. 돌 하나에 새겨져있는 노란 화살표를 보지 못하고 춤을 춰댔고 예쁜 하늘 가까이 가겠다고 무작정 달려댔으니까. 그렇게 여러번 길을 잃다보니 해가 떠버렸다. 우리가 아는 맑은 하늘이 되었고 나는 힘들어졌다. 해가 뜰 때는 예쁜데 뜨고 나서는 뜨거움이라는 고통을 준다. 그러면 빨리 가고 싶어져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된다.


맵스미 어플에서는 오른쪽으로 가라했고 노란 화살표는 왼쪽을 향했다. 뜨거우니까 빨리가고 싶었다. 맵스미를 택했다. 최단거리만 알려주는 맵스미는 내게 고속도로 같은 길을 30분 넘게 걷게 만들었다. 인도는 없었고, 쌩쌩 달리는 차 옆에 조그만한 틈으로 걸었다. 무섭게 지나가는 차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한시간은 걸은 줄 알았더니 고작 10분이 지나있었다. 겨우겨우 걸어가다 어떤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고 맥도날드를 발견했다. 순례길을 찾아야할 것 같아 와이파이를 쓰기위해 일단 들어갔다. 커피를 한잔 시켜놓고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맵스미에 순례길을 별표로 일일이 다 표시해두었다. 쌩쌩 달리는 도로를 더이상 가지 않아도 되서 좋았다. 해가 뜨거워진거는 관심 밖이였다.


안전한 순례길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이 참 단순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겨우 찾게된 순례길은 너무나도 반가웠다. 노란 화살표가 보이자 예스! 소리를 쳤다. 신이나서 지나가는 주민에게 본디아~ 인사도 했다. 그러다 드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놀고있는 양떼들도 보고, 예쁜 담벼락도 만났다. 이래서 화살표따라 걸어야 하나 싶었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간 세상은 안전하고, 아름다웠고, 뜨거운 하늘이 아니라 맑은 하늘로 보였다. 너무 뜨거워 지칠때즈음 한강같은 길이 나와 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불만을 진정시켜줬다. 한강의 바람을 즐기다 큰 마을에 도착하게 됐다. 총 36km 중 20km가 남은 지점이라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일렀다. 어제를 통해 밥 먹은 후에는 몸이 무거워져 걷기가 힘들다는걸 배웠다. 하지만, 어제를 통해 배운 또 다른 사실은 가다가 슈퍼든 음식점이든 만나기 어려워 마을이 보이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큰 마을이니까 음식점 메뉴나 보자고 들어간 곳에서 나도 모르게 앉아버렸다. 그 순간 신나버려서 샹그리아를 덜컥 시켜버렸다.


스크린샷 2023-03-05 오전 11.03.15.png 해 뜨기 전 마을에서 걸어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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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샷 2023-03-05 오전 11.03.38.png 아리랑 텐션
스크린샷 2023-03-05 오전 11.09.34.png 도로 그만 걷고싶다..
스크린샷 2023-03-05 오전 11.10.34.JPG 어쩌다 색감이 예쁜 어떤 마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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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샷 2023-03-05 오전 11.12.32.JPG 한강 같던 길
스크린샷 2023-03-05 오전 11.12.35.JPG 바람이 불어서 시원했다

깨알정보

순례길에 있는 대부분 식당에는 '메뉴 델 디아'라고 순례자를 위한 메뉴가 있다. 10유로 정도에 아주 든든한 한끼를 할 수 있는 메뉴다. 하지만 내가 걷는 포르투갈 길에서는 큰 마을 아니고서는 만나기 어려웠던 메뉴이기도 하다.

Gronze : https://www.gronze.com/


여행기를 영상으로 보고싶다면 : https://youtu.be/0mBUj3ebB0o

일기장 글꼴 출처 : 나눔손글씨 가람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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