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날을 떠나보냈다

야광귀의 의뢰 (4) – 작별 인사

by 두부

5화


대부분 귀신들의 기억은 제멋대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그래서 귀신의 말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다행히 그런 귀신일지라도,

요한의 힘으로 마음이 통하는 순간—

왜곡되거나 잊혔던 기억조차

서서히 되살아난다.


희진도 그랬다.


그녀는 대학 새내기였다.

누구보다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

미래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풋풋한 사랑을 기다렸다.


입학하자마자 친해진 유미와는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

같은 강의를 듣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웃고 떠들며, 우정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벚꽃이 흐드러지던 캠퍼스에서

희진의 첫사랑도 피어났다.


과 모임에서 만난 복학생 오빠.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하게 짧은 머리에

왁스로 정성껏 꾸민 모습이

왠지 모르게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활짝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큼직한 입.

그 웃음에 희진은 마음을 빼앗겼다.


혼자 끙끙 앓던 희진은

결국 유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유미는 둘이 잘되게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오빠가 듣는 강의 시간을 알아내

수업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우연히’ 마주치고,

그가 일하는 카페에 ‘우연히’ 들러 커피를 마셨다.


그러던 중,

오빠가 토익 공부를 하러

‘나이스 영어학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진과 유미는 망설임 없이 그 학원에 등록했고,

같은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면서

금세 가까워졌다.


어느 날 밤,

학원이 끝나고 모인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유미가 잔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오빠,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비밀이야.” 하고 웃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눈빛은 분명했다.

희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때, 오빠가 슬그머니 물었다.

“무슨 꽃 좋아해?”


희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백합이요.”

유미도 곧바로 웃으며 맞장구쳤다.

“나도. 나도 백합 좋아해.”


오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학원에서 오빠의 친구가 다가와 말했다.

“지금 옥상 좀 가봐.

걔가 너네 찾던데, 뭔가 급해 보였어.”


희진과 유미는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갔다.

옥상에서 오빠는 백합이 그려진 운동화를 들고 서 있었다.


희진은 그 백합을 보자마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나, 널 좋아하고 있었어.

네가 좋아한다던 꽃도 그려봤어…”


희진의 입꼬리가 막 올라가려는 찰나—


“… 유미야.”


희진의 얼굴이 굳었다.

숨도, 시선도 멎었다.

유미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희진을 바라봤다.


“유미야, 바로 대답하진 않아도 돼.

일단 선물만 받아줘.”


오빠는 유미의 손에 신발을 쥐여주고

쑥스러운 듯 자리를 떴다.


희진은 귀까지 붉게 물들었다.

그건 창피함이 아닌, 분노였다.


“이런 거였어? 너 이런 거였냐고?

여우처럼 오빠 꼬셔놓고선, 날 도와준 척?”

“희진아, 아니야… 난 진짜 몰랐어.

당연히 오빠가 널…”

“뭐? 나 좋아한다고? 지금 나 바보 만드는 거야?

나만 바보였던 거냐고!”


유미는 운동화를 내밀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니야, 희진아. 진짜 아니야.

이거 너 가져. 난 필요 없어.”


희진은 손으로 쳐내며 소리쳤다.

“됐어! 동정이라도 해?

웃기지 마. 착한 척 다 하더니—

소름 돋아, 진짜.

너 같은 애가… 제일 무서워.”


말다툼은 생각보다 격해졌고,

주변엔 그들을 말릴 사람도 없었다.

희진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희진에게는 실연보다도

마음을 열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감정만이 가득했다.


그날, 희진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옥상 난간에 발끝을 올렸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갔다.


유미도,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었다.

두고두고 기억하게,

두고두고 괴로워하게.


그리고— 그녀는 몸을 던졌다.




희진은 다시 그때의 그 자리에 서 있다.

다시 유미를 마주한 지금,

분노는 사라지고

허탈함만이 남았다.


“유미야, 괜찮아.”


긴 침묵 끝,

유미의 눈에는 공포 대신 원망이 차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가 괜찮아?

넌 내가 괜찮았을 거 같아?

그날 이후로 난,

껍데기만 남았어.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고!

지금까지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눈물이 터지자, 유미는 참아온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가버리면 그만이야?

왜 죽어? 왜! 왜 그런 선택을 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난 그 오빠 따위, 관심도 없었어.

난 친구가 더 좋았단 말이야!

너랑의 우정이 훨씬 더 소중했다고!”


희진은 유미에게 다가가려다 멈칫하고 요한을 보았다.

그는 잔잔히 미소 지으며 가볍게 끄덕였다.

그제야 희진은 유미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어.”


유미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나… 진짜 얼마나 미안했는지 알아?

단 하루도 널 잊은 적 없어.

그때 널 붙잡을 수만 있었다면… 그랬다면—”


“유미야, 이제 그만하자.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이제 다 놓아줘.”




“실례합니다… 진지한 얘기 중에 죄송한데요.”

요한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휴지를 내밀었다.

유미는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그게, 야광 님…

아니, 희진 님이 찾으시는 물건이 있어서요.”

“물건이요?”

“네… 꽃 그려진 운동화요.

그게 있어야만 희진 님이 떠나실 수 있어요.”


유미는 코끝을 훌쩍이며 테라스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난간 위에 올려진 운동화를 들고 돌아왔다.


“이거 맞죠?”


희진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어?”


“버릴 수도, 간직할 수도 없었어.

그래서 이 자리에 카페를 열고, 여기에 올려뒀어.

널 기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희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미안해… 유미야…

그땐 나만 생각했어.

네가 상처받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오래 괴로워할 줄은 몰랐어.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 있을 줄은…”


“받아... 너 이거 필요하잖아.”


유미는 운동화를 희진의 품에 안겼다.


“너 가져.”

“너 야광귀 얘기 몰라?

신발 내가 가져가면, 넌 1년 내내 재수 없어.”


유미는 여전히 눈이 벌겋게 상기된 채,

피식 웃었다.


“1년? 나 지금 10년도 넘게 재수 없었거든.”

둘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희진은 운동화를 신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요한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희진이 감사를 전하자, 그는 힘껏 손을 흔들어주었다.

유미의 마음에도 비로소 평온이 깃들었다.


얼어붙은 가슴이 녹아내린 듯,

오래된 응어리를 털어낸 듯,

희진은 사뿐사뿐 뒤돌아갔다.


그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요한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제 정말 저편으로 떠났다는 뜻이었다.


사라진 그녀를 향해,

유미는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 손끝에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들이 남아 있었다.


《야광귀의 의뢰: 신발을 찾아줘》 – 사건 종료




커피숍을 나서자, 어김없이 그 소녀가 따라붙었다.


“김요한!”

“이제 통성명해도 되는 건가요?”

“그래, 난 태이. 이태이.”


소녀는 손바닥을 펴고, 요한에게 쭉 내밀었다.

요한은 그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폰, 폰 달라고.”

태이는 손을 내저으며 재촉했다.


요한이 핸드폰을 건네자,

태이는 자기 번호를 눌러 전화한 뒤,

툭— 던지듯 다시 요한에게 건넸다.


“내 번호. 저장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태이가 무심하게 물었다.


“귀신은… 직접 현신시키는 거야? 아니면 다른 능력도 있어?”

“그건… 영업 비밀인데요?”

“현신이 막혀 있을 텐데 어떻게 한 거야?”

“그것도 영업 비밀.”

“흥. 뭐, 차차 알아가면 되지.

그리고 동갑인데 존댓말은 거북하다?"


그 말을 끝으로,

태이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요한은 태이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몸 안을 맴도는 진한 여운이 번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요한의 등 뒤로 기묘한 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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