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큐버스의 의뢰 (1)
집으로 돌아서던 요한은 숨이 멎을 뻔했다.
말쑥한 정장을 입은, 훤칠한 남성이 눈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야만 얼굴이 보일 정도의 장신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니었다.
푸른 눈동자. 게다가… 외국 요괴였다!
요한은 순간, 영어 울렁증이 도졌다.
‘제발 말 걸지 말아라, 제발…’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 지나쳤다.
그때—
뜻밖에도 유창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요한 씨, 심부름센터 요한 씨 맞죠?”
요한은 눈이 동그래졌다.
“…네? 한국말하세요?”
영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요한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네, 제가 김요한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장승 대감님이 알려주셨어요.”
그 말에 요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저씨, 또 어디다 심어 두신 거야?'
마침, 먼지 정령 하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요한이 눈을 째리자
먼지 정령은 움찔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총애받던 사도 요한.
저를 좀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아, 그… 제가 그분은 아니고요.
그렇게 대단한 이미지랑은 거리가 좀…”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뭐, 작은 도움쯤은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저와 가게로 가실까요?”
요괴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John the Apostle…”
짧게 인사를 건넨 요한은 곧장 가게로 향했다.
불 꺼진 심부름센터 간판 아래,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장승 대감이 보였다.
요한은 헐레벌떡 달려가 가게 문을 열고 불을 켰다.
“아저씨, 언제부터 기다리신 거예요?”
그는 대감을 붙잡아 가운데 탁자로 이끌었다.
탁자 위로 고모가 스르르 솟아올랐다.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요한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오래 안 기다렸어. 고놈, 수선 떨기는…”
“쪽지라도 남기고 가시지…”
“됐다, 장승이 괜히 장승이냐? 서서 기다리는 건 하나도 안 힘들다.”
“아무튼, 이제 그러지 마세요. 알겠죠?”
“알았다, 알았어.
허허, 600살 노인한테 잔소리라니.”
웃음이 거치자, 곧 요한의 표정이 굳었다.
“아저씨, 오늘 다 들으셨죠?”
“그래, 먼지들이 그러더구나.
그 야광귀, 악귀로 변할 뻔했다지?”
“네. 그런데…
귀신이 인간이랑 접촉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현신 금지법’ 때문에
좋은 의도의 현신도, 악귀의 현신도 다 막혔지.”
“그 야광귀가… 사람 목을 잡았어요…”
요한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악귀가 되려던 순간,
어떤 여자애가 향을 피웠어요.
그 향 덕에 야광귀도, 사람들도 몽롱해졌죠.
그 냄새,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어요.
외할머니 집에서요.
근데… 그 여자애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무당 같았다던데.”
“네, 맞아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주변에 다른 영기가 전혀 안 느껴졌어요.
무당이면 몸주신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 애는 아니었어요.
게다가 부적까지 꺼내고…
귀신을 헤치려는 것 같았어요.”
장승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오늘 수고 많았다. 욕봤어, 네가.
그 무당은 내가 알아보마.”
요한은 낮에 구석에 두었던 바둑판에 시선을 멈췄다.
“아저씨랑 오목도 둬야 하는데…”
“지금 네 꼴이 그게 아니잖냐.”
대감의 입에서 바람 빠지듯 피식 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이긴다면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다.
이런 널 상대로는 재미도 없지.”
장승 대감이 요한을 자리에서 일으켜
가게 뒤편에 마련된 방으로 데려갔다.
“아저씨, 전 괜찮아요. 아저씨도 좀 쉬세요.”
요한이 밀어냈지만, 대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요한은 순순히 방에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대감의 얼굴에는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요한은 그가 떠난 걸 확인하고는 다시 방에서 나왔다.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고모 귀신은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이 슬프게 흔들렸다.
“고모, 나 조금만. 금방 하고 잘게.
난 괜찮아.”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
의뢰록을 한 장씩 들춰보기 시작했다.
이번엔 부모님 기록 이전,
‘현신 금지법’이 생기기 전의 오래된 문서였다.
지금껏 별 의미 없다 여겨 넘겼던 기록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종이는 바래고 글자는 번져 있었다.
낯선 표현들로 가득해 읽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금지법 이전의 기록은 불길했다—
사건은 위험했고
의뢰는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수많은 신과 요괴가 현신하던 시대.
무언가가 무너지고, 섞이고,
경계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중 요한의 눈에 유난히 반복되는 단어가 들어왔다.
消滅 — 소멸.
대체 무엇을, 누구를 소멸시킨 걸까?
왜… 그리고 어떻게?
읽을수록 등줄기에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 소멸이 결정됨.
해당 존재, 인간의 틈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
요한은 낮게 읊조렸다.
의뢰인 이름은… 알아볼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며 기록을 훑다가,
붉게 바랜 도장이 눈에 들어왔다.
흔한 관청 인장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기묘한 문양이었다.
요한은 손을 뻗어 그 문양에 가까이 가져갔다.
닿기도 전에 문양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마치—
기억 너머 어딘가에서
수백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였다.
그 작은 속삭임 속엔
울부짖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아우성이 뒤섞여 있었다.
요한의 숨이 가빠졌다.
머릿속 깊은 곳까지 그 소리가 스며들었다.
그 순간—
“꼬끼오오오—!”
요한은 온몸이 튀어 오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닭이 우는 소리에 아침이 열렸다.
맞다. 이 상점가에는 진짜 수탉이 있다.
닭 울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요한은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어젯밤 마주쳤던 그 외국 요괴가 서 있었다.
“혹시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온 건 아니죠?”
부드럽고 정확한 한국어 발음.
정말 외국 요괴가 맞는 걸까?
“아닙니다. 이제 막 문 열 시간이었어요.
들어오세요.”
요한은 손님을 탁자로 안내하며 의뢰자 카드를 꺼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남자는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데미안입니다. 인큐버스죠.”
푸른 눈동자가 요한을 깊게 파고들었다.
심장이 붙잡힌 듯
그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정신이 휘청거렸다.
남자조차 무너뜨릴 만큼, 인큐버스의 마력은 강렬했다.
찰나의 방심만으로도, 그대로 빨려들 것 같았다.
요한은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번 의뢰, 절대 만만치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