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바람이 우리를 스쳤다
아침부터 학교는 들떠 있었다.
창가에 매달린 햇살이 분주했고,
교정의 나무 그림자는 어린잎처럼 흔들렸다.
복도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튀었고,
교실 안의 소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그 틈을 지나 자리에 앉았다.
칠판 앞, 사람들 사이로 윤기가 보였다.
눈이 부셔서 잠시 찌푸리더니,
내 쪽을 향해 짧게 웃었다.
“단오에 씨름대회 한대.”
그의 말이 가볍게 흘렀다.
“나 나가보려고.”
뜻밖이었다.
“넌 너무 말랐잖아.”
튀어나온 한마디에
교실의 공기가 멈춘 듯 무거워졌다.
윤기의 얼굴에 그늘이 스치자,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걱정돼서.”
그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걱정해 준 거구나.
씨름은 몸집보다 기술이야, 테크닉.”
화사한 그의 뒤로 봄빛이 느리게 번졌다.
하교 무렵, 그는 다시 내 옆에 섰다.
창문으로 스며든 오후의 빛이
교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저번에 너네 동네 놀러 간다고 했던 거 기억나?”
잊은 줄 알았다.
혼자 의미를 부여했던 걸까.
괜히 서운했고, 마음은 닫혀 갔는데
또다시, 작은 진동이 일었다.
“근데, 너, 매일 어떤 남자애랑 같이 가더라.
남자친구인 줄 알고.”
그 끝은 공중에 머물며, 잔잔히 일렁였다.
반사적으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니야, 남자친구.”
그 말이 입술을 떠나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 가느다란 금이 생겼다.
윤기의 웃음이 피어올랐다.
늦은 봄의 온기에 녹아드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 웃음이 바람에 옅게 스쳤다.
“그럼 너네 동네 가도 되는 거지?”
창밖에서 나뭇잎이 뒤집히고,
운동장의 깃발이 흔들렸다.
나부끼는 떨림이,
내 안에서도 같은 결로 남아 불었다.
윤기는 오늘 바로 가자고 했다.
대답을 해야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백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현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떠올랐다.
셋이 함께 가도 괜찮을까.
불편해지진 않을까.
그래도, 거절하기엔 명분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진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교문으로 발을 옮겼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멀리서 이현이 보였다.
내리쬐는 햇빛을 손등으로 막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 잠깐 미소가 비쳤다가,
윤기가 옆으로 다가서자 서서히 가라앉았다.
“누구야?”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얘기했던 친구, 윤기야.
오늘 미술 숙제 때문에 같이 가려고.”
말을 끝내고도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어긋난 일 같았다.
이현의 손이 내 머리 위에 닿았다.
손끝이 따뜻했다.
마음도 함께 풀어졌다.
고개를 들자,
이현이 부드럽게 내 시선을 받아 주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귓가에 메아리만 남았다.
셋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후덥함 때문인지
버스를 기다리던 우리 위로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윤기의 표정이 굳고,
나는 가방 끈만 세게 쥐었다.
셋이 버스에 올랐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지만,
각자의 시선은 서로 닿지 않았다.
창문 너머 풍경만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봄은 저물고,
초여름의 빛이 묵직하게 번지고 있었다.
버스가 고개를 넘어 무운동으로 향할 때,
이현은 눈을 감았다.
윤기는 이어폰을 꽂았고,
나는 사라져 가는 나무의 실루엣만 따라갔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세 사람의 숨결이 조금씩 엇나가고 있었다.
버스는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그때, 윤기가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 되게 조용하다.”
그 한마디가 나와 이현을 불러냈다.
나는 그저 앞만 바라봤다.
무운동.
이제 곧, 내가 나고 자란 그 마을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