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과 위안 사이, 봄날의 우리
햇살은 따뜻했지만, 공기는 아직 싸늘했다.
봄이라 부르기엔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한식날이라 그런지,
산기슭엔 제사상과 국화를 든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나는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양손에는 흰 국화 두 송이와,
집에서 정성껏 부친 화전이 들려 있었다.
“엄마, 아빠… 나 왔어.”
묘비를 어루만지며 낮게 인사했다.
묘 앞의 낙엽을 쓸어내고 향을 피웠다.
연기가 흩어지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잡초를 뽑고, 지난번에 꽂아둔 시든 국화를 빼내
새로 가져온 꽃으로 바꿔 꽂았다.
그리고 돗자리를 펴고 앉아 화전을 꺼냈다.
“한식이잖아. 화전은 꼭 먹어야 해.
엄마 아빠도 잘 먹어.”
화전을 조금 잘라 주변에 뿌리고,
하나를 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
예전엔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할머니는 오시지 못했다.
딸과 사위의 묘를 어찌 보시겠는가.
그래서 매번 나 혼자 왔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미안해하며 우셨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늘 내 몫까지 울어 주셨다.
그때, 내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너 성묘 안 갔어?”
“갔다 왔지.”
이현이 몸을 낮추어,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나도… 어머님, 아버님 뵈야지.”
그 말에 목이 잠시 메었다.
묘 앞의 향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나는 자리를 살짝 비켜 주었다.
이현은 절을 하고 두 손을 모았다.
허리를 숙이는 그의 어깨 위로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지나갔다.
우리는 돗자리에 나란히 앉아
하릴없이 흔들리는 향불을 바라봤다.
“그날 기억나?”
이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부모님들… 여행 가신 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식탁 위에 엄마의 쪽지가 있었다.
‘단오야, 냉장고에 식혜 있다. 우리 잠깐 다녀올게.’
아무렇지 않은 메모 한 장이,
엄마의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미안해.”
그 한마디에 나는 아무런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이현의 부모님과 나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그날도 넷이 함께 축제를 가셨다.
넷이 떠난 축제,
함께 탄 자동차.
왜 우리 부모님만 돌아가신 걸까.
왜 하필, 이현네 차가 아니라 우리 차였을까.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현의 잘못도, 이현 부모님의 잘못도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겨진 차 잔해,
하얀 조명 아래의 응급실.
그 안에서 모든 게 빠르게 흔들렸다.
“어머님의 유언…
난 지킬 거야.”
이현이 쓸쓸히 웃었다.
“그 약속도, 너도.
내가 지킬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산자락에서 타고 내려온 바람이 향불을 꺼질 듯 흔들었다.
“그 약속… 우리 약혼 말이야.
너에겐, 족쇄인 걸까?”
끝내 새어 나왔다.
이현은 그런 내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했다.
긴 침묵 속에서도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빛엔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애틋함이 있었다.
“단오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나는… 그 약속이 싫진 않아.”
나는 묘 앞에 다시 향을 올렸다.
두 줄기의 연기가 나란히 피어올랐다.
마치, 하늘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두 사람처럼.
꽃샘을 부리듯 찬기는 여전히 매서웠지만,
이상하게 한쪽 어깨는 따뜻했다.
내 옆에 있는 이현 때문이었을까.
온기 속에서 부쩍 가까이 다가온 봄이었지만,
내 마음은 아직 그 봄과는 성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