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의 조문

인큐버스의 의뢰 (7) – 명부를 거스른 자들

by 두부

12화


누워 있는 대민을 살피던 장승 대감이 낮게 말했다.

“영기가 약해지고 있어.”


“영기요?”

옆에서 듣던 마리가 다급히 물었다.


“이 아이, 외국 요괴잖아.

신계의 법칙은 단순하면서도 완고하다.

이곳 규칙을 너무 어긴 요괴는… 소멸하기 마련이야.”


“소멸이라니…

그럼, 죽는다는 거예요?”


마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너져 앉았다.

“왜 이런 일이…

제가 죽는다는 것도 갑작스러운데…”


요한의 얼굴이 굳었다.

“누나… 이게 어떻게…”


그는 숨을 몰아쉬다,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포기하지 마요. 방법은 있어요.

제가 꼭 찾을 거예요.”


요한은 곧장 벽 쪽으로 달려갔다.

한쪽 벽면은 신계 법령집과 판례집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신과 인간의 문제… 신인사무(神人事務)…”

요한은 신인관계로 엮인 고문서를 모두 꺼냈다.

태이도 말없이 옆에서 거들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분명히 길이 있을 거야…”


요한과 태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펼쳤다.

옆에는 책이 한 권, 두 권 쌓여 갔다.

세 번째 책을 빠르게 넘기던 요한은,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신계 판례집 권 32〉

제18사

사건: 소사 고을 아무개가 염라 전 집행사자에게

떡·엽전·신발을 뇌물로 제공,

사자는 이에 응하여 명부를 조작하여 그의 수명을 연장함.


판결 요지:

사자의 뇌물 수수 및 명부 변조 행위는

직분의 청렴성과 공정성을 현저히 훼손한 중대한 사건으로 인정됨.

다만, 이미 반영된 수명은 소급 취소하지 아니함.


비고: 해당 사자 징계, 복무 연한 일천 년을 추가.


“저승사자에게 뭘 주니까 명부를 고쳐준 사건이 있어!”


태이가 코웃음을 쳤다.

“뇌물 먹고 눈감아준 거네.

근데 여기도 봐봐.”


요한은 태이가 보여준 사건을 훑었다.



〈신계 판례집 권 33〉

제5사

사건: 전주 고을의 아무개가 시왕전 집행사자에게 뇌물을 제공,

사자는 이에 응하여 다른 영혼을 데려와 염라를 기만한 사실이 발각됨.


판결 요지:

사자가 명부 집행을 고의로 왜곡하여

신계의 질서를 문란케 한 중대한 사안으로 인정됨.

이는 사자의 직분을 배반한 용서 불가의 범죄에 해당.


비고: 해당 사자 파면 후 지옥 투신, 관련 인간은 즉시 엄벌.


태이가 손가락으로 마지막 문장을 짚었다.

“보이지?

첫 사건에서 복무만 늘리니까,

여기선 더 대담하게 남의 영혼까지 끌고 갔잖아.

그래서 이번엔 지옥행까지 됐네.

뇌물 주는 방법은 완전히 막힌 거야.”


요한은 입술을 깨물며 책을 덮었다.

“…그럼 사자를 설득하는 방법은 이제 불가능이네.”




날이 밝자 어김없이 수탉이 울어 젖혔다.

긴 머리에 하얀 소복을 입은 고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모, 하루쯤 밤새도 괜찮아.”

요한이 억지로 웃자, 고모는 울상이 되었다.


요한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다 한 사건을 보고 태이를 불렀다.



〈신계 판례집 권 36〉

제2사

사건: 탈의파의 착오로 명부 기록이 잘못되어

황해 고을 아무개의 영혼을 데려감.


판결 요지:

이는 행정 착오로 즉시 시정 가능하다고 판단됨.


비고: 잘못 데려간 영혼은 곧 이승으로 환송,

탈의파는 근신 삼백 년 징계.


“명부 기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네.”

“아니면 탈의파에게…

일부러 잘못 기록하게 한다거나.”

둘은 잠시 마주 보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때 방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대민이 의식을 되찾은 듯, 몸을 일으키려 하자,

마리가 놀라 그를 말리고 있었다.


요한은 서둘러 달려가 대민을 붙잡았다.

“삼촌, 움직이지 말아요!”


마리는 밤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대민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나도 눈 좀 붙여요.

다 잘될 거니깐요...”


그때, 태이가 급하게 외쳤다.

“요한아, 빨리 와봐!”



〈신계 판례집 권 37〉

제12사

사건: 인간의 치성에 따라

북두칠성과 남두칠성이 한양 아무개의 수명을 연장함.


판결 요지:

칠성신의 직접 판단에 의한 수명 연장은

재판부 또한 존중하여 번복하지 않음.

다만, 잦은 개입은 사후 질서와 명부의 권위를 흔들 수 있으므로

신격 간 합의와 극히 신중한 개입을 권고함.


비고: 해당 인간의 연장된 수명은 유효로 인정.

향후 유사 사안은 재판부와 칠성신 간 합의 원칙에 따를 것을 요청함.


“칠성신이 직접 수명을 연장했대.”

“치성? 어떤 정성을 보인 거지?”


요한의 눈에 결심이 스쳤다.

“일단, 직접 찾아가 봐야겠어.”


이전 11화담을 넘은 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