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재미없는데 재밌는, 한국인인 듯 미국인인 그 남자
작년 3월은 비가 참 많이 왔다. 3월 말이 되어가는데도 주말이 되면 비가 엄청나게 퍼부었다.
내가 생각한 캘리포니아 날씨는 개뿔. 그냥 비 많이 오는 장마철 한국이랑 똑같았다.
그 이친아 (이모 친구 아들)에게 연락처를 넘겨준 뒤, 한 주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니 보통 연락처를 받으면 언제 만날지 아님 적어도 인사치례정도는 하기 위해 연락이 있어야 되지 않나?
라고 생각이 들며 수요일쯤 되었을까. 매우 정중한 한국어로 문자하나가 왔다.
이친아: 안녕하세요! 요번에 소개 받게된 '이친아'라고 해요
비가 좀 온다고는 하지만 요번 토요일에 시간 어떠신지 물어보려고 연락드려요
나: 안녕하세요! 비가 온다고는 하지만.. 토요일에 시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친아: 미국 오신지 얼마 안되셨다고 들었어요! 어디 가고 싶으신 곳이나 드시고 싶은거 있으신가요?
나: 음.. 사실 제가 온지 얼마 안되서 잘 몰라요.. 추천 해 주세요!!
이친아: 사천음식, 양식, 일식 세가지 생각해봤습니당
나: 우왕 근데 진짜 제가 다 잘먹어서 드시고 싶은거 고르셔도 됩니다
이친아: 그럼 사천음식으로 가시죠
??????????
보통 첫 날은 파스타, 피자 이런거 먹는거 아닌가? 난 심지어 사천음식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첫 만남을 고대하며 기다리던 와중에 우연찮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 00씨, 얼른 이 번호로 전화해서 담당자 '이친아' 한테 물건 싣지 말라고 해요."
???????이친아?????????
그렇다.. 그는 우리 회사의 거래처 담당 직원이었다.
나름의 첫 만남인가.. 괜히 떨리는 마음으로 물 한 잔 하고 목을 여러번 가듬은 뒤 전화를 걸었다.
" 큼큼..안녕하세요, 저 000의 00인데요."
"아..00씨..요??아..하하..핳..네..하하"
그도 적잖이 당황한 듯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어색한 웃음 뿐이었고 나 역시 용건만 전달한 뒤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후하후하. 두근 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다시 일하려고 했으나 그의 첫 인상, 아닌 첫 목소리는 생각보다 댄디한 목소리에 뭐랄까.. 아니 뭐. 좋았다. 목소리가.
그리고 다가 온 첫 만남의 날. 나는 이미 1시간 전부터 모든 준비를 마쳤고 시간이 되자 그는 집 문을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가니 문 밖에는 청바지에 맨투맨, 양털 후리스를 걸친 남자가 전봇대마냥 우산을 쓰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레 인사를 하고 차에 타려고하자 그는 우산을 씌워주려고 들고 있는 우산을 왔다갔다 조준했지만 이미 비는 내 어깨를 적시고 남았다. 차에 타 히터를 키면서 문득 나는 차가 이렇게 좁은 공간이었음을 처음 알았다. 이 좁은 공간에 어색함과 정적이 우리를 가뒀고, 나는 어디다 눈을 둘지 몰라 창 밖만 응시하였다.
"날씨가 생각보다 춥네요. 비도 많이 오고." 보다못한 내가 운을 뗐다.
" 그러네요. 원래 캘리포니아가 이러지 않는데"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다시 우리는 조용하게 바깥 풍경만 보며 사천 음식집이 가까워지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천 음식집, 모든 것은 영어로 되어있었고 무엇을 파는지도 모르는 나는 적잖이 당황한 채로 메뉴판만 멀뚱히 보고 있었다.
"드시고 싶은거 시키세요."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그에게 또 다시 메뉴 선정권을 넘겼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그렇게 나온 이쑤시개에 꽂힌 양꼬치들과 긴 콩 볶음, 맥주 2병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와서 말하지만, 나는 양꼬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쑤시개에 꽂힌 양꼬치는 잘 빠지지도 않았고 맘같아서는 맨 손으로 이쑤시개를 잡고 먹고 싶었지만 첫 만남이기에 차마 그것만은 자제하였다. 젓가락으로 고기를 붙잡고 끌어내릴 때마다 고기는 저 멀리 튀어버렸고 결국 나는 애꿎은 맥주만 마시고 양꼬치는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콩은 더더욱 먹기 싫었다.
그런데 정말 웃긴건, 그 날 밥을 제대로 못 먹은건 기억이 나는데 사실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가 오는 주룩주룩 오던 그 날, 정말 많이 웃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국적은 미국인데 한국어를 나보다 잘했고 내가 하는 한국 유머에 첨언을 해주는 이 남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이 사람도 읽었고 내가 펑펑 울었던 영화에 이 남자 역시 배게를 잡고 울었단다. 너무나도 신기하게 우리의 대화는 막힘없이 술술 흘러갔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 꾼이 되기 바빴다. 직원이 마감시간임을 알리자 그제야 우리는 시간이 꽤 늦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그가 집 앞에 나를 내려주며 수줍은 듯 말했다.
" 너무 재밌었어요. 정말로요"
참 이상하다. 재미없는데 재밌고, 한국인인 듯 미국인인 남자에게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나도 이 남자가 또 보고 싶은건지.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