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는 도대체 왜 이남자랑
즐거웠던 어제를 자기 전까지 되새기며 한 숨도 못 잔 나였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누군가와 이런 감정을 느낀 것에 대해 내 안의 연애세포가 주책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제 해야지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 남자는 바로 다음 날 나를 자신의 형과 형수의 집으로 데려갔다. 지금 생 각 해 보면 소개팅 다음 날 자신의 가족에게 나를 소개시킨 것도 이상하고 따라간 나도 참. 뭐에 홀렸나 싶다. 그러나 그 날 밤은 참 재밌었고 그의 형, 형수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냥 이것 또한 미국 문화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좀 더 가족 친화적이니까? 이 남자는 그 날 술 한모금 제대로 마시지 않고 나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고 사실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난다.
그리고 온 월요일, 아무 연락이 없다.
보통 잘 들어갔냐, 아님, 속은 괜찮냐 이런거 물어보지 않나.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데 지쳐 점심 시간 쯤 먼저 연락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쌀국수 드실래요?'
허 참, 바로 '네' 할 뻔 했지만 연락이 없던게 괜시리 미웠다.
'제가 속이 안좋아서 오늘은 그냥 점심 안먹으려구요'
남자는 괜찮다고 속이 많이 쓰릴테니 뭐라도 꼭 챙겨 먹으라고 하며 대화를 종결시켰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인내의 순간들이 지나가고 퇴근 시간이 왔다.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었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연락이 없었다. 내가 별로였던 걸까? 근데 그러면 쌀국수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지 않지 않나? 아니, 자기 형네는 왜 데려간건데? 나는 혼란해진 마음에 계속 물음표를 던지며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켰다. '남자 마음' '남자가 좋아하면' '짝남 심리'와 같은 것들을 검색하며 그의 의도를 파악하던 중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 남자다.
"저.. 월요일 잘 보내셨나요..? 잘 지내셨는지 궁금해서.."
참 나. (도대체 내가 이 참 나, 라는 단어를 몇번이나 얘기하는 건지..) 그제도, 어제도 봤고 연락도 없었으면서 뭐가 그리 궁금한지. 그러나 그는 꽤나 용기를 낸 사람처럼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나는 또 다시 그와의 대화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은 3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내일도 전화하겠다는 그는 화요일, 수요일, 매일 매일 잊지 않고 동일한 시간에 전화하였고 나는 퇴근하고 저녁 먹은 후 그의 전화를 기다리다 자기 전까지 그와의 수다에 흠뻑 젖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도 모르겠다. 그는 사실상 남들에게 그렇게 재밌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리 인기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말이 많은 편도 아닌 것 같고 누가봐도 내향적이고 나서는 것 보다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하던 중 문득 나는 그가 보고 싶었다. 그는 매일매일 전화를 걸었지만 만나자는 이야기는 단언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용기 결심했고 전화를 끊기 전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우리 내일 퇴근하고 또 볼까요?"
그는 조금 당황한 듯,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일은 같이 맛있는거 먹어요."
우리는 다운타운에 있는 지중해 음식점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고 주위를 좀 걸었다. 비가 와서 추웠던 3월은 어느새 4월이 되어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셔츠 하나로도 살짝 더웠고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하자 가게 앞 줄지어 선 알전구들에서 따스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곳에도 한국과 같이 꽃샘 추위가 있는 듯 해가 지니 약간 쌀쌀한 기운이 내 코를 빨갛게 만들었고, 우리는 운치있던 그 곳을 한참을 걸었다. 그는 통화와는 또 다르게 말주변이 없었고 우리는 그저 몇 마디를 주고 받으며 한참을 걷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 오는 길 내내 우리는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아쉬웠던 것 같다. 30분 만에 집에 도착하고 내리려던 찰나 나와 그는 동시에 입을 뗐다.
"저기,"
"저기,"
그리고 그가 먼저 선수 쳐 말했다.
"우리 이번주 토요일에도 볼까요?"
나는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너무 빠르게 뛰어 진정이 안되었다.
나도 그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 토요일, 봄. 그 날은 참 달았다. 모든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농구 경기를 보러 가던 길에 슬쩍 슬쩍 스치던 손끝, 옆 자리에 앉아 농구에 집중한 그에게서 느껴졌던 빠른 심장 소리. 차 안 창가에 기대어 밖을보면서도 느껴지는 그의 시선, 이 모든 것들이 참 달아 나를 어지럽게 했다. 봄은 괜히 봄이 아니었다. 모든 생명을 다시 깨우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는 그 봄의 힘에 이끌려 그 봄의 향기에 취해, 그 봄의 당도에 녹아 나는 넌지시 그를 보며 말했다.
"1년 뒤에 제가 여기 있을지, 없을지 몰라요. 제 비자는 1년 뒤면 끝나거든요."
그도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근데 그런거 다 생각하지 말고 우리 그냥 만날까요?"
그의 눈은 커졌고 누가봐도 놀란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번 더 그에게 말했다. "우리 만나보자구요. 좀 더 진지하게"
나는 도대체 왜 그에게 고백했을까. 단순히 이야기하는게 너무 재밌어서? 우리의 취향이 너무 잘 맞아서? 가치관이 비슷해서? 아님 정말 그 날 날씨가 좋아서? 봄의 힘이 이렇게 강했나? 이 질문에 하나의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냥 이 사람이 가진 온기가 나까지 따뜻하게 했는지, 그렇게 내 맘에도 봄이 왔던건지, 명확한 어떤 이유 보다 그냥 나도 모르게 용기가 생겼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한순간에 생긴 그 확신으로 나는 그에게 고백했고 그는 당황한 듯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정말로."
+쿠키+
지금와서 말하지만 그는 이렇게 빨리 고백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 자기가 그 다음주 쯤 밤 바다에서 고백을 하려고 계획했다나 뭐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