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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숲 Apr 26. 2020

01. 할머니 이야기

2019년 3월 14일


할머니는 점점 꺼져가는 전등 불빛처럼 기억을 잊어버리신다. 최근 있었던 일들을 잘 떠올리지 못하고, 했던 이야기를 재방송 라디오처럼 계속 들려주신다. 그래도 할머니가 해주시는 옛날 이야기는 재밌고 슬프다. 요새들어 아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가족들이 걱정해주고 찾아오면 다시 기분이 나아지신다. 찾아가 말벚을 해드리니 언제 아팠나 싶으실 정도로 이야기 꽃을 피우셨다.


열몇 살 어릴 적, 삼박골 작은 엄마네에 애기를 봐주러 자주 갔어. 어릴 때였어. 그때 동생이 뒤에서 장난을 쳐서 넘어지는 바람에 팔을 다쳤어. 근데 가지고 가던 비누가 깨진거야. 동생이 어쩔 줄 몰라. 작은 엄마가 다친 건 신경도 안쓰고 혼만 내는 거야. 할머니가 그걸 보고 작은 엄마한테 너도 욕이나 먹어볼래, 하고 화를 냈어. 할머니가 찬물에 팔을 마사지해주곤 칭칭 감아줬어. 형부가 날 마중나왔는데 형부를 보니까 눈물이 막 나. 형부가 왜 그러냐고 왜 우냐고 그러곤 팔에 칭칭 감은 걸 보고 날 업어줬어. 형부가 나중에 내 대신 작은 엄마한테 화를 내줬어.


나는 열 번도 넘게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는다. 할머니는 어릴 적에 팔을 다쳤는데 형부며 자신을 업어주고 친할머니가 치료해주어 가족들의 애정과 보살핌을 느꼈던 일을 길게 늘어놓으신다. 할머니는 그래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의 사랑이 필요해서. 보살핌과 애정어린 손길이 필요해서.


할머니는 가족들한테 서운했던 일도 늘어놓으신다.


우리 아부지가 아주 호랑이여서 새벽부터 농삿일을 하고 아부지 앞에선 눕지도 못했어. 여자라고 학교도 보내주질 않았어. 아부지가 너 학교갈래? 묻는데 답을 못하겠는 거야. 언니가 2학년까지만 다니다가 관뒀거든. 언니가 너 학교 가지 마라. 배우지도 못하고 병신된다. 그래서 아부지, 나는 안가면 안돼요? 하니까 아버지가 그럼, 하고 가지 말랬어.


할머니는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 한글을 배우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들이 계속 복지관에서 하는 한글 교실을 권유했지만 노인이 배워봤자 뭐하냐며 가질 않으셨다. 글을 띄엄띄엄 읽으시긴 해도 쓰지는 못하셨다. 할머니는 자식이 없다. 나에게는 친할머니, 외할머니가 안계신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서로 없는 부분을 메우듯 친척 할머니는 조카(나의 엄마)가 사는 동네에 정착하여 20여 년째 우리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계시다.



사진 pixabay Free-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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