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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숲 Apr 26. 2020

02.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

2020년 04월 26일


할머니가 갑자기 가족들한테 전화를 하셔서 화를 내시거나, 엄마가 그릇이나 양념통을 훔쳐갔다고 의심하셨다. 격양된 목소리로 욕도 하시며 소리치시더니, 다음 날에는 화를 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신다. 엄마가 전화를 안받자, 네 엄마는 왜 삐졌냐? 나한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투로 물어보신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치매 초기 증상은 아니신가 걱정이 심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작년부터 할머니와 치매 예방 검사를 함께 가려고 했으나, 할머니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한다며 화를 내시며 안가시려고 했다. 안가시려고 하는 분을 억지로 병원에 데려가기도 참 어렵다.  


올해 코로나19가 기승일 때쯤 일을 관두고 집에서 쉬게된 내가 할머니 일을 떠맡게 되었다. '할머니, 치매는 머리에 혈관이 약해지면 생길 수 있어요. 노인 분들은 예방 검사를 미리 받아가며 예방해야한데요.' 곁에 앉아 차근차근 설명하며 설득하니, 병원을 가시겠다고 했다. 일을 관두고 나서야 가족들 일에 신경쓸 수 있게 되어 씁쓸했다.


일을 관두기 전에는 야근을 하다가 할머니가 전화를 하시면 곤란했었다. "네, 할머니 저 오래 통화하기 어려워요. 네, 그러셨어요." 할머니는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내 말을 못듣고 전화를 안 끊으신다. 사무실에서는 전화 받기가 눈치 보여 종종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야했다. 일을 관두고 요새들어 전화를 잘 받으니,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셔서 시시콜콜한 불안함, 몸이 아픈 것, 의심되는 이웃 할머니, 엄마가 가져갔다고 의심되는 그릇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의심하며 화를 내실 때가 가장 힘들다. 의사는 알츠하이머 치매, 노인성 치매로 진단하는 모양이다. 할머니가 앞에 있어서 의사에게 '치매가 맞냐'고 묻지를 못하고 나중에 지어준 약봉투에 진단코드를 읽는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 의사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했다고 의심하시기 때문에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말을 조심한다. 의사랑 말을 할 때도 '할머니 어떠셨어요? 맞지요?' 하고 할머니가 먼저 말할 수 있도록 존중해줘야한다.  


우리 엄마는 불쌍하다. 치매 증상이 생길 수록 할머니는 엄마를 괴롭힌다. 나이가 드시니 가장 의지하던 엄마(조카)에게 외로움이 서운함이 된 모양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게 잘 안되어, 하신다.


나도 어렵다. 의연한 체를 해도 작년 겨울에 할머니가 갑자기 나를 의심하며 화를 내셨을 때 나도 두려웠다. 그때는 치매인 줄 몰랐기 때문에 아연실색했고, 코로나를 핑계로 할머니를 찾아뵙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욕설을 하며 화내던 일이 터지자 엄마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지금은 내가 치매에 대한 유투브 영상을 찾아보며 할머니를 찾아뵙는다. 요즘 엄마는 혼자 베란다 창가에 앉아 치매 치료에 대한 책을 읽고 계신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몸이 아파서 잔뜩 화가 나있는 할머니께 후리지아 꽃을 사다드렸다. 꽃, 부활절 달걀, 소소한 선물들을 가져다드리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신다. 할머니는 건강했던 예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며 과일을 먹겠냐며 쟁반에 내오셨다. 찻잔에는 뜨거운 물을 부어서 믹스커피를 타주셨다. "근데 네 엄마는 뭣 때문에 삐졌냐?"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 내게 할머니가 묻는다. 영 모르겠다는 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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