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호모 사케르로 다시 읽기
“어느 하나에도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내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영화는 카뮈의 문장으로 첫 부분을 장식한다.
한 개인의 자아는 완결될 수 있는 성질일까. 또 다시, 사건의 이후다. 새해가 다가올 때면 만년 다이어리-라는 형식의 상품들이 희망과 자존감을 이야기하는 덤핑 서적처럼 생산되어 나온다. 이는 우리가 자기 기록에 대한 욕망을 상품화한 것에 수요를 늘상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준다. 비록 하루와 자기 자신을 기록하는 나날이 일주일 만에 그치더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소비하며 ‘나’의 자아를 쓰다듬을 줄 아는 ‘주체’라는 지위를 공고히 다진다. 정확히는 우리는 모든 것이 물신화되는 환경 속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자아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생산해야 한다는 동기를 가지고 일기장에게 압박감을 느끼는 것에 가깝다. 일기장만큼 자의식이 깊이 발전하는 곳은 없다.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주체의 자아를 파고들면서 늘어지는 중력이 강하게 작용한다.
자아는 완결되어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보통의 희망과는 다르게 많은 상황에서 의지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듯이, 자의식이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상황이 자의식을 형성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상아탑에서 일기장을 쓰면 쓸수록 ‘나’에게 천착하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우리는 전신거울에 ‘나’라는 협소한 상황만을 집어넣기 때문에 ‘나’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접혀져버리는, 그런 하루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서사는 완결되기를 기다리는 걸까.
상황이라는 제반 조건은 자의식의 늪에 빠지게 하기도 하지만, 비체로 규정되어 왔던 이들에 대한 감각을 열어주며 주체는 타자와 무관히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의식의 사유방식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실존주의적 가치관을 조각에 담아내기로 유명한 스위스의 조각가 자코메티의 작품들은 처음부터 실처럼 가느다란 형성을 하고 있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를 위시한 전쟁이 끝난 후, 자코메티의 사람의 모습을 본 뜬 조각들은 극단적으로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진 인간. 자코메티는 전쟁의 참혹함을 통해 인간이 법외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를 경험한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벗어나 살이 벗겨지고 위태롭게 내던져지는 인간상을 그의 작품에 투사하여 바라보게 된다.
현대 주체들의 한계를 겨누는 <디태치먼트>와 2차 세계대전, 전염병, 비상상황과 같은 ‘예외상황’이 긴밀히 연결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돼지 목에 진주”라고 작 중의 교사 클라우센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곧이어 “체벌은 부활해야 해요! 망할 아이들은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어요!”라고 떠드는 다른 교사의 고함이 겹쳐지고 음향과 페이드는 독일 의회의 모습으로 이동한다. ‘보호자’로 인정받는 선생의 목소리에서 파시즘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작 중에서 히틀러의 목소리, 히틀러의 연설 장면 쇼트가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는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경유하여 주권자의 생사여탈권, ‘예외상태’의 폭력성에 주목한다.
주위를 전혀 감각하지 못 하는 듯 철조망을 붙잡고 몸을 맡긴 채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는 선생은 주인공 헨리에게 “내가 보여요?”라고 말한 후 “세상에 드디어…”라며 읊조린다. 그 선생은 학교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소외되어 말상대를 찾지 못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이 잦은 인물이다.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이 모든 문제들을 근원’이라 이야기되는 ‘보호자, 주체의 책임성’을 계속해서 강조하면서도 학생 뿐만 아니라 선생들마저 소외되고 있는 모습을 적확히 풀어낸다. ‘문제아’로 치부되는 학생들의 관리에 스트레스를 받은 선생이 동료에게 울며 하소연하는 씬에서도 마찬가지다. 슬프게도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 개개인의 연대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포착한다. 우리가 모두 ‘예외상태’, 이른바 벌거벗어 소외된 몸과 시대 문명이 구축한 문화가 구분가지 않는 비식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오늘날의 생명정치 시대에서는 조에zoe라는 피조물과 비오스bios라는 시민권을 가진 정치적 삶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에 착안하여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봉건 사회의 영주와 같은 주권권력에서 생명권력으로, 즉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에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권자의 ‘생사여탈권’ 하에서 호모 사케르Homo Sacer, 벌거벗은 생명은 탄생한다. 호모 사케르는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으면서 그 가장자리로서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다. 사케르Sacer는 ‘신성하면서 저주받은heilig und verflucht’이라는 대립항을 동시에 포함한다. 타자에 대한 폭력의 욕구는 호모 사케르의 성스러움이라는 기본값을 통해 재현된다. 이를 테면 한 사회에서 ‘정조’ 개념 혹은 ‘정신대’와 같은 존재는 성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주받은 비체인 것이다.
영화 내에서 상이하지만 동일한 행적을 지닌 쇼트들은 책임감이 부재한 보호자와 방치된 아이들의 모습을 좇는다. 고양이를 잡아 망치로 잔혹하게 때려 죽이던 한 학생은 헨리에게 발각되어 상담실로 불려간다. 비인간인 고양이를 죽이고선 자신의 기분을 “고양이처럼 덫에 걸린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부분은 인위적 규범과 자연상태가 구분가지 않는 상황을 그려낸다. 그는 자연상태에서 방치된 비인간-정치적 삶, 비오스를 부여받지 못한 생명-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모습 또한 이와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고 느낀다. 아감벤은 홉스의 정치학을 분석하며 자연상태는 인위적 규범인 노모스nomos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며, ‘만인에 반하는 법’을 유지시킬 수 있는 주권 권력의 인격 속에 살아남는다고 파악한다. 아감벤은 자연상태에서의 삶과 마찬가지로 리바이어던의 보호 하의 생명은 보장된다는 사실은 없다는 것에 주목하며 현대 권력의 생사여탈권을 강조한다.
또한 이 영화가 우리의 이목을 끄는 점은 집착스럽게 벌거벗은 이미지들을 붙잡는다는 것이다. 신성하면서 저주받은, 죽여도 되지만 희생양으로는 삼을 수 없는 벌거벗은 몸을 빠르게 전환되는 감각적인 쇼트들로 환원시켜 우리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포르노 잡지를 몰래 보며 모델의 벗은 몸을 즐기던 선생 찰리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학생에게 “네 옷차림은 남학생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단다. 존중받고 싶지 않니?”라고 훈계한 후 학생이 지시에 따르자 “또 다른 학생을 구했군”이라고 모순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위한다. 하지만 곧이어 칠판으로 연출한 씬에서 한 사람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묘사를 통해 한갓 대상으로 전락하는 타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와중, 몇 초 되지 않는 짤막한 쇼트를 통해 우리를 당혹시키기도 한다. 폐쇄적인 노인 요양원 시설의 화장실 변기 위에서 벌거벗은 채 비참히 벽에 기대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처럼 말이다. 주인공 헨리와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는 헨리의 어머니가 약을 과다 복용하고 벌거벗은 채 화장실에 각목처럼 쓰러져있는 회상적인 쇼트가 등장한다. 이는 후에 헨리와 에리카와의 대화에서 가정 내에서 어떠한 보호망도 부재한 채로 할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죽게 내버려진’ 사회적 타살로 밝혀지게 된다. 헨리가 울부짖으며 자신은 성도착자가 아니라고 울부짖는 장면에서도 에리카의 벗은 몸이 스쳐지나간다. 결국 보호 주체가 존재하는 사회 구성체로서의 가정은 사적이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들뢰즈가 파시즘의 군림 조건으로서 개별 인격체와 가정을 언급한 것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여성성 규범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체형을 가지고 흑백 사진을 찍어 작업하는 비주류 예술을 하는 학생 메레디스 또한 벌거벗은 몸이라 명명할 수 있다. 그는 ‘썅년’이라고 욕 먹고 선생에게 ‘다리를 벌릴’ 것이라고 비난받는 주변부 인물이다. 영화는 메레디스가 점심시간에 화장실 변기 위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을 갑작스럽게 비추는데 여기에서의 화장실은 ‘수용소’라고 얘기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일상에서의 상황은 아우슈비츠의 예외상태를 적극적으로 환유한다.
벌거벗은 몸과 함께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지점은 영화의 서사가 주인공 헨리의 자아를 지탱하고 연결하는 방식이다. ‘내가 산 램프에서 지니가 나와 큰 소리로 울었다. 그 눈물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여러 번 사고 팔린다.’ 자신의 일기를 읽는 헨리의 나레이션부터 길거리를 방황하는 그의 모습까지, 카메라 앵글은 초반부터 헨리를 집요하게 따라온다. 헨리가 감각하는 ‘나’, 주체에는 타자와의 기묘한 거리두기에 대한 성찰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는 “아이들과 친해질 필요는 없었어요. 정교사가 올 때까지 버티면 되는 겁니다”라며 한 달 간의 ‘임시 교사’라는 타이틀에 안도하며 적당한 거리감의 마약, 타자를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는 데 적절히 이용하는 동일성의 사유방식을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이를 자아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외재성을 자기 대상화, 자기 동일시하는 방식이라고 사유한다. 헨리는 뉴욕 심야 거리에서 성매매를 하며 떠도는 에리카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성립되지 못한 주체에 연연하며 자신과 에리카를 분리시킨다. 에리카는 심야 버스에서 오랄 섹스를 하고 성구매자에게 페이를 요구하자 뺨을 맞는다. 헨리는 그 모습과는 무관하다는 듯 그 버스 안에서 어린 자신의 모습과 어머니의 옆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에리카가 자신을 따라오자 “네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짓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정말 순식간에 늙어버릴 테니.”라 하자 에리카는 “나한테 왜 이래? 난 감정도 없을까봐?”라며 반문한다. 알게 모르게 헨리가 회상하는 ‘어머니’라는 타자는 자아를 보듬기 위한 존재론적인 방법이 되고 정작 타자의 자리는 갈 곳을 잃고 만다. 여기서 서구의 존재론 철학을 경계하며 타자의 ‘윤리학’을 제시하는 레비나스의 테제는 설득력을 얻는다.
헨리는 캄캄한 밤거리와 대비되는 빨간 벽, 열정의 상징 앞에서 에리카와 재회했을 때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몸과 마음이 지친 에리카를 자신의 공동체 안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기엔 부족했던 걸까. 임시 교사만큼이나 ‘임시’적인 환대였음이 드러난다. 헨리의 초대는 비대해진 자아와 헨리가 ‘무심함의 순간’이라 변호하는 책임 유기의 시간 앞에서 오래가지 못한다. 헨리가 적당히 거리두기를 통해 에리카를 자신의 자아를 봉합하는 데에 활용한 경향도 조금씩 보이기도 하는데, 그가 할아버지의 일기장에 끊임없이 접속하려 하며 조각난 유년과 자아를 보상하려는 것과도 유비되는 모습이다.
영화의 서사 구조는 헨리의 자아를 완결성으로 봉합하기 위해 쉬지 않고 굴러간다. 다만 할리우드 영화 식의 현실의 계급적 모습을 은폐하는 폐쇄적 내러티브와는 구분해야 한다. 존재의 본래성을 강조하며 피투적 존재의 자아가 타자를 자신의 가능성 안으로 이용한다는 하이데거와 타자에 의존해 자의식을 완성하는 상호주체성을 얘기한 사르트르에 대해 레비나스가 비판했듯이 이 내러티브에선 이 미묘한 동일성의 폭력이 조금씩 묻어난다.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에서 더 나아가 존재론과 이별하여 ‘존재와 다르게’ 되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고향을 버리고 나 아닌 것들에 계속해서 몰두하여 ‘본래성’을 얻어야 한다고 말이다. 현존재로서 타자를 자신의 서사 봉합에 이용하는 주체, 헨리의 시선에서 내내 서술된다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이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 더 깊이 사유할 가능성은 여기, 타자와의 실패 상황, 시선의 감각 속에 남아 있다.
헨리는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지인들이 네 죽음에 어떻게 애도하는지 쓰라”고 말한다. 익명의 한 글은 묵직한 실패의 역사를 암시한다. ‘그녀는 왜 화나고 비참해 했을까? 우리 가족은 그 애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멍청하고 이기적인 아이다. 그녀는 이제 프린스턴대에 더 이상 진학 할 수 없다.’라고 쓰여진 글에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전인격적인 환대가 부재할 때 나타나는 애도의 실패를 목격하고 만다.
‘타자의 얼굴이 나의 살갗에 가깝게 다가올 때 나는 몸과 감성으로 타자의 벌거벗음에 응답한다.’라는 레비나스의 전언을 기억해야 한다. 아감벤은 보편성의 탈을 두른 인권 운동의 한계를 말하며 ‘인간의 존엄성’은 공허하다고 얘기한 바 있다. 생명정치는 계량화된 생명 자체만을 주목할 뿐 벌거벗은 인간들의 정치적 삶에 대해선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즉 비오스와 대면하지 않으려는 헨리의 설교는 보편적인 입발림, 자기수사적인 수업이 된다. 메레디스가 자신의 살갗을 내보이며 도움을 요청할 때, 헨리는 “우린 모두 같아. 삶의 혼돈 속에 살고 있지. 이 시기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동일성의 사유방식을 냉정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메레디스가 사진을 작업하여 헨리에게 선물한 작품이 ‘얼굴 없는 남자와 텅 빈 교실’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작품은 헨리가 에리카를 떠나보내고 난 후의 쇼트에서도 미쟝센으로 활용된다.
메레디스는 학교에서 꾸준히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얼굴’, 정확히는 ‘동공’을 포착해내기 위해 애쓴다. 후반부, 메레디스의 카메라는 흑백 프레임을 통해 헨리의 ‘동공’을 파고든다. 응시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는 보편의 시선으로 벌거벗은 얼굴을 공허히 응시하는 동공의 감각. 그것을 관객들에게 거꾸로 전이시키며 시선의 전복을 제안한다. 소위 ‘주체’들의 동공을 파고드는 프레임들의 전환 속에서 메레디스는 약을 먹고 쓰러진다.
헨리는 어머니의 상황처럼 반복된 메레디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다. 타자의 죽음이라는 직간접적인 상황. 그 상황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다시는 전처럼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타자와의 대면 실패 상황에서 헨리가 다시 에리카를 찾아 보육원으로 향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타자를 이용하는 자아에서 다시금 눈을 맞추고 ‘유심함’으로 마주하려는 자아로 헨리의 주체 의식은 한층 성장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타자에게 몰두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타자를 자신의 자아 안으로 소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환대하는 것, 벌거 벗은 몸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윤리를 제시한다. 타자와의 관계 조망을 통해 본래성을 획득하는 일, 레비나스는 이를 통해 하이데거를 비롯한 “저는 정교사가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라는 근대의 사유, 동일성의 환유 방식이 야기한 폭력적인 세태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다시 제안해야 하지 않을까. 동등한 주체끼리의 관계에서 타인을 동일하게 포섭하지 않으려는, 타자의 공간을 마련하는 제1의 윤리 원칙, 헨리가 언급한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을 밀어내라는 의무 말이다. 물론 그 자리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윤리적으로 가정된 심급’이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 안에서는 임시 보호, 임시 선생이라는 환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는 완결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중요한 것은 자아를, 우리의 이야기를 섣불리 완결짓는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자코메티의 손과 손가락으로 벗은 몸들을 한 점, 한 점 덧붙이고 매만지고 가늘어진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질감을 쓸어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