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해고자의 고공농성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1.
지난 달 중순 즈음, 박카스 한 박스를 들고 강남역 사거리를 밟았다. 차로 밀집된 대로를 배경으로 첨단의 CCTV 철탑에는 얼기설기 지어진 농성 장소가 있었고, 사람이 지은 둥지에서 왜인지 기시감을 느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에서 사람다운 삶을 위해 그 공간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들. 김용희, 이재용 삼성 해고자는 고공에서, 천막에서 기꺼이 현장에서의 싸움을 이어나가고 계셨다.
이번 달 내내 가족과의 갈등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를 쥐어싸고 있을 때, 지난 달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던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살아내지 못한 바다가 너무도 많다. 폭우를 맞는 이를 바라보며 느끼는 상호주체적 연대의 부재에 대한 모멸감. 어쩌면, 적당한 애도만을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상호주체는 선천적 한계들로 점철된 하나의 공유된 사회세계, 면대면의 연결된 책임 공유와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애도의 다음 단계가 절실히 필요하다.
천막에서 뵙게 된 이재용 님도 철탑에서 분투하시는 김용희 님과 마찬가지로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가 내쫓긴 삼성중공업 해고자다. 노조설립 운동으로 인해 국가안전기획부 대공분실에 수없이 끌려가셨는데, 간첩죄 명목으로 잡혀가 전기고문 협박을 40분 동안 받았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고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김용희 활동가 님 또한 삼성 측에 의해 간첩 오명, 협박 및 납치, 아내에 대한 정황 상 사주된 성폭력 시도, 집단 폭행으로 중환자실 입원 등을 겪고 와중에 아버님의 의문의 실종 사건까지 연이어 닥쳤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이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라는 데리다의 명제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정치성의 소멸과 노동운동에 대한 검붉은 딱지, 그리고 일련의 기업 신화라는 보편값이 폭력화되는 방식은 욕망이 실패하는 시기에 신학이 어떻게 재정립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2.
이런 인권탄압의 정당화가 어떤 식으로 자행된 것일까? 국제적 외주화, 글로벌 분업 체계. 삼성 ‘미래전략실’ 주도 하, ‘무노조 경영 원칙’의 저임금 유지 핵심전략-노조 파괴 전략은 폭로된 바 있는 ‘노사관리 기본지침(1989)’, ‘S그룹 노사전략(2012)’, ‘조직 안정화 방안(2014)’문건 등으로 대표된다. 삼성은 2012년 경, 인도네시아 삼성 하청 17곳의 노조가입을 모두 와해하기도 하며, 하청업체에도 무노조 경영을 관철해왔다.
이러한 기조를 바탕으로 산업구조는 수직계열화-아웃소싱 등, 무수히 파고드는 n차 협력업체로 외주화되며 당연하게도 노동권 담론은 사라진다. 우리는 2014년에도, 2018년 겨울에도 우리, 노동자,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최소한의 안전망, 혹 그 너머의 가치실현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목도하지 않았는가? 한국 전체 기업 가운데 46% 정도는 선도, 대기업 중심의 거래 네트워크에 편입되어 있다. 경쟁력이 비교하위에 있는 업체들은 불가피하게 납품 단가 후려치기를 받아들인다. 국내외, 유기적으로 본사-한국공장-국외공장-국외하청의 거대한 균열구조가 완성된다.
우습게도 마찬가지다. 어제 낮,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국정농단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이 있었다. 2015년 이뤄진 제일모직(이재용 최대주주), 삼성물산 합병과정에선 적정 합병비율 보고서가 조작되고, 결국 제일모직의 가치가 부풀려진 채로 합병이 결정된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는 국정농단 정경유착 비리와 연결되며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지분율이 0.6%이었지만, 본인 23.2%로 최대주주인 제일모직에 유리한 합병이 이뤄져 삼성전자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과 맥락으로 경영권 상속이 이뤄지고, 총수일가가 지배하는 다른 계열사들이 삼성전자에 출자하게 하여 내부지분율을 높이고 지배권을 유지하며 또한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계열사 출자의 순환 지배구조로 인해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실질적인 ‘주인장’ 행세가 가능하다. 2011년 기준으로는, 재벌 계열사 10곳 중 7곳은 대기업 총수들이 본인 혹은 친인척 지분 없이 계열사 출자만으로 지배해왔다.
3.
작금의 풍경들은 우리의 욕망을 충실히 충족시키고 있을까. 만약 어떤 이가 일상적 노동 소외를 기꺼이 감수한다면, 그것은 욕망하는 것을 그 체재 내에서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균열 속에서, (상품의 이미지-잠재성을 소비하며 물신적 속성을 내재하는 행태를) ‘소비주의적 주체’라고 표현하는 기괴한 욕망마저 실체를 드러내며 무산된다. 혹은 그 가능성을 본다. 50여일 간의 단식투쟁도 서슴지 않으셨던 김용희 님의 고공농성은 이제 82일차를 맞고 있다. 김용희 님의 고공농성을 마주하며, 이 철탑 둥지는 자본 체제,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우리의 욕망이 철저히 좌절당하는 몰락의 신호라고 진단하게 된다. 몰락의 신호 앞에서 다시금 던져야하는 질문. 혹시 지금 당신이 의탁하는 종교, 신의 존재가 있나요? 만약 없다고 답한다면, 자신이 무신론이라고 스스로 확실히 정립할 수 있고, 그것을 정말로 확실히 믿냐고 묻고 싶다.
욕망의 도구로서 신학은 언제나 작동한다. 애도의 시대에선 저마다의 신을 소중히 쥐고 있다. 재구축, 변화를 유예하게 만드는 신학의 역사가 엿보이기도 한다. 경제신학, 사회, 문화상징자본을 움켜쥐고 있는 대기업의 입사 성공 신화 매뉴얼, 노력의 성공가도, 노동자 삶 위에 존재하는 삼성의 성장동력. 우리를 순순히 복무하게 하는 것. 비로소 몰락에의 리듬 앞에 서있다. 그렇다면 애도에만 머물 것인가? 국가와 세계시장 앞에서 홀로 서며 파편화되는, ‘법’ 앞에서 법외 상태가 되는 인간상의 그림자를 보며 자치(autonomy)의 자유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 연결고리는 결사체에 심어져있으며, 애도의 다음 단계, 곧 행동의 독트린이라고 믿는다.
*2019년 8월 작성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