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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해 Dec 04. 2019

피 묻은 슬로건과 잘린 손가락의 노래

영화 <기생충> 리뷰

빈곤이라는 기생충을 대하는, 어쩌면 우리의 태도는 묻고 있다. 

“아버지, 계획이 뭐예요?”


봉준호가 던지고자 했던 부조리극은 의도가 분명한 계급 우화이다. 우리는 부조리극에서만 더듬더듬 탈출을 모색할 수 있다. 대부분은 자신이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사회 맥락 속에 포함되고 구속(engage)되어 있는지를 자기 자신에게까지 숨기고 뚜렷한 인식을 회피하며 지낸다. ‘자기네 등불을 어둡게 하고 첫머리만 보고 끝을 안 본다거나, 반대로 끝만 보고 첫머리를 못 보는 식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¹ 일종의 판타스마고리이다. 


흥미롭게도 영화를 120분 내내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계획’의 존재다. 계획은 본래 삶의 연속성과도 연결이 되며, 곧 미래로 이끌고 가는 매개인 동시에 자신의 삶의 조건들을 선택해나가는 과정 중 하나다. 우리는 늘 계획과 일상적으로 함께한다. 하지만 영화에선 우리가 한 번도 본래 의미의 계획을 경험하지 못 했다는 듯이 쉴 새 없이 ‘계획’이라는 워딩이 나오게 하면서 우리의 집중력에 따귀를 때린다.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획’이라고, 집중하라고.


<기생충>에서 김기택(송강호)은 비가 내리던 날, 박 사장의 자택 지하실에서 마주한 전 가사노동자 남편에게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대체 계획은 있어?”라고 묻는다. 기택이 윽박지르던 가사노동자의 남편은 아이러니하게도 기택과 똑같이 ‘카스테라’ 매장을 운영하다가 폭삭 망했으며, 몇 년 전에 박 사장 집의 지하실에 흘러들어와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 홈리스와 다름없다.


초반부에서 아들 기우가 위조된 연세대 재학증명서를 들고 “아버지, 저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들어갈 거거든요.”라고 말할 때에도, 기택은  “오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며 치켜세운다. 상황이 절정, 극한에 이르고 낮은 지대에 있는 자신의 동네가 침수되어갈 때도 기택은 계속 ‘계획’이 있다며 되뇌인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설명되지 않는 자신을 설명하고 싶어한다. 


침수로 인해 자신의 주거환경이 박살이 나고 대피소라는 공간에 이르러서야 기택은 자신이 중얼거리던 ‘계획’의 함의를 시인한다. 대피소에 멍하니 누워서 “아버지, 계획이 뭐예요? 계획 있다면서요?”라는 아들의 질문에 “최고의 계획은 무계획이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내뱉고 만다. ‘계획’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자신의 삶을 연속해서 이끌어 줄 ‘본질’이라고 되뇌어 왔지만 사실 본질이 아닌 뒤틀린 본질, 환상에 불과하다. 결국 자신의 ‘계획’ 하에 발버둥쳤던 생존방식, 경쟁자라고 치부되는 노동자들을 밀어내고 박 사장의 집에 기어들어갔던 것 등은 절대로 본질적인 방식,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 해결에 다가갈 수 없다는 뜻이다. 


봉준호 감독의 대표적인 표현 방식이다. 영화 <괴물>에서는 정부가 존재하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만들어 괴물에 집중하기 보다는 방역과 바이러스 감염자 검거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이처럼 봉준호는 영화 내내 역설적이지만 그게 현실에서 일어나서 더 역설적인 장면들을 통해 맥락적인 부분-본질과 비본질의 구분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 힘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넣는다. 


역시나 이는 기우가 일련의 생각들을 결심하며 끝나는 엔딩 장면과도 연결되어 있다. 기우는 “아버지,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돈을 미친 듯이 열심히 벌어 말끔히 차려입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지하실이 딸린 박 사장의 집을 사들여 지하실에서 기생하고 있을 아버지 기택과 다시 만나고야 말겠다는 상상을 한다. 이로써 영화는 끝까지 부조리극으로 마무리된다. ‘근본적인 계획’은 무계획의 계획만큼이나 허무맹랑하다. 그래서 한국을 떠받치고 있는 ‘노력’의 신화만큼이나 현실이다. 가족의 해체를 자신의 능력 여부에 떠넘기려는 미봉책에 불과함에도 날카롭게 현실적이며 역설적이지 않아서 역설적이다. ‘근본적인 계획’에 진짜 근본은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기택은 박 사장의 가족으로부터 냄새가 난다고 눈치를 받은 후, 자신에게서 날 수밖에 없는 ‘반지하 냄새’, 상승과 하강의 위치 권력을 확인받는 기제에 서서히 집착하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보여지는 기택의 냄새 집착은 눈 앞의 수직적인 동네와 사회구조를 부정하고 자위하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인 동시에, 자본의 폭력 자체와 그것을 영위하는 자들에 대한 살아남기 식의 감정이 아닌 씰룩거리는 본연의 감정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 후반, 박 사장이 ‘바퀴벌레’들의 피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찌푸리며 도망가려는 것을 보며 곧바로 사장을 찔러 죽이게 된다. 기택이 바퀴벌레 같은 삶들, 자신의 가족과 지하의 가족이 죽어가는 파국 속에서 박 사장이 ‘차키 줘!’라며 바퀴벌레들의 죽음을 외면하려 할 때,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질에 대한 고민을 벼락 같은 찰나로나마 하게 되었다는 자극적이지만 간접적인 상징이다. 


앞서 언급한 지하실의 가족과 기택의 가족, ‘카스테라’로 공유되는 두 가족은 빈곤, 주거취약계층, 어쩌면 수없는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 하청 노동자처럼 지하 깊은 곳까지 외주화되는 삶을 나타낸다. 같은 빈곤, 주거취약계층임에도, 반지하 가족과 지하 가족은 서로의 반지하-지하의 공간성을 헐뜯으며 자신의 ‘자리’ 차지, 밀어내기에 바쁘다. 박 사장의 자택으로 표상되는 자본, 기업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만 그 속에서 ‘바퀴벌레’처럼 기생하며 겨우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차라리 환상 속에서 살기를 택했던 것 같다. 


2017년 서울시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반지하, 지하, 옥탑의 주거 취약 환경에 사는 가구는 약 27만 가구로 7.2%에 속한다. 분명 서울에 거주 중이지만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사람들이다. 쪽방, 고시원 같은 비주택 거주자는 더할 나위 없으며 보통 사회의 ‘중요’한 담론에 있어서 반지하 거주자들의 삶, 재개발로 쫓겨난 이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이같이 작 중에서도 지하인들은 아무도 알지 못 하는 지하에 거주하며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도 지하의 가사노동자 남편은 “박 사장님은 대단하신 분이야, 그분 덕분에 여기에서라도 먹고 살 수 있었어”-라며 전등 스위치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박아대며 모스부호 장치를 통해 뒤틀린 충성심을 드러낸다. 지하실에 자리한 수많은 기업가, 자본가들의 우상화된 사진과 책들은 노동자, 빈곤 계층으로서 자본경영계에 기생하며 자신의 의식마저 개조해버린 모습을 기괴하게 그려낸다.


지하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기택에게도 이 순간이 잠깐이나마 찾아온다. 기택의 가족은 박 사장의 차, 자택이라는 공간에서 지내오던 다른 바퀴벌레 가족, 기사와 가사노동자를 쫓아 밀어내고 그 틈으로 자신들의 자리가 확보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린다. 가족은 박 사장 가족이 몇 박으로 캠핑을 떠나자 박 사장 집으로 몰래 들어와 집 주인처럼 생활하다가 밤 중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쫓아낸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스크린 사이로 흐른다.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겠지-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처절하게 겨우 박 사장 집에 기생하게 된 것만큼이나 쫓겨난 이들의 쉽지 않은 나날을 이미 몸으로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쫓겨나는 이들은 절대로 일생에 단 한 번만 쫓겨나지 않는다. 그런 삶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사삭 기어다녀야만 한다. 


이렇게 지하에서 지하로 옮겨다니는 현실을 감각하면서 대화 도중에 기택은 “박 사장님 가족, 사실 착한 거 같아.”라고 말하며 자위하기 시작한다. 노동자 계급 내에서 기꺼이 충성할 수 있는 ‘착하고 멋있는 자본’이라는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한다. 이윤이라는 말보다는 ‘성장’이라는 말로, 국민의 번영을 위해 기꺼이 파이의 크기 확대에 힘쓰는. 사실은 이윤 논리에 따른 방향만 설정되면 한순간에 기사와 수십 년을 함께 해온 가사노동자를 망설임 없이 쫓아낼 수 있는 것이 ‘자본’의 속성인데도.


기택의 이런 논리체계는 어김없이 곧바로 ‘폭우’로 인해 깨지고 만다. 폭우라는 기제를 통해 감독은 기택의 의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하실에서 기생하는 이들의 존재와 분수대의 첨단에서 쏟아져내리는 ‘낙수효과’의 실체를 확인시킨다. 내리막길로, 수없는 계단으로, 하수구로 흘러내리는 낙수효과는 저지대를 침수시키고, 기우로 하여금 ‘수석’이라는 아편을 더욱 소중하게 껴안게 만든다. 처절한 ‘낙수효과’의 상징성이다. 수직적인 공간에서 낙수효과는 마침내 빈곤 계층을 침수시킬 수밖에 없다는 직간접적인 메타포. 어쩌면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말은 균열 구조로 끝없이 외주화되는 노동자와 빈곤층의 계획이 성립조차 불가능한 공간성에 대한 자조 섞인 고발이다. 


결국 감독은 ‘계획’이라는 장치를 영화 끝까지 위치시킴으로써 허위의식에 불과한 계획을 버리고 몰락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자본과 자본에 외주화된 국가의 폭력,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허상이 본질을 가린다는 작품의 묘사 방식은 현실과 유리될 수가 없어서 자연스레 2009년 초,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사회가 용산참사를 기억해온 방식. 재개발이라는 이윤 논리 앞에서 지하로 기어들어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우리는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용산 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이라는 훌륭한 ‘계획’이 있었다. 용산구 한강로 3가 남일당 건물이 있던 용산 4구역은 용산 역세권 재개발 지역 16곳 중에서 개발 이익이 가장 큰 곳이었다고 한다. 수주한 대형 건설사가 막대한 이윤 창출을 이룰 수 있는 재개발, 강제퇴거와 철거 속에서 오롯이 피해를 감당하는 것은 지자체도, 부동산 소유자와 투자자도 아닌 철거민과 노점상, 임대차상인들이다. 강제퇴거라는 생존의 위협 속에서 꿈틀대기 위해 남일당 옥상-수직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에서 감히 망루를 지으려 했던 ‘바퀴벌레’들은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로 재판정에 섰다. 물론 검찰은 경찰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는 무혐의 처분했다. 


되풀이되는 무계획의 역사다. 정부와 기업이 노동계를 효과적으로 분리하고 노동조합을 와해하기 위해 파업 시 업무방해죄와 손해배상 청구소송, 가압류의 형민법을 적용시키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윤의 논리 앞에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니, 국제노동기구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 여부 등은 하등 쓸모없다. 합법의 외피가 쓰인 채로 지하인들의 삶은 산산이 부서진다. 사람들이 빈곤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분명 존재한다. 


“김씨는 어디로?” 

<기생충> 후반부, 뉴스에서는 사장을 살해하고 도망친 기택이 ‘증발’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기택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깨달았다’라고 읊조린다. 지하실의 삶으로. 


발터 벤야민은 “목적론적 사관 아래 말해지지 않는 것들. 전달에는 언제나 전달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주하려고 하는 반복항제가 정말 폭력적인 것”이다. 김씨는 정말로 어디로 갔을까? 홈리스, 노점상, 임대차상인과 철거민들, 비정규직, 노동착취로 죽지 않기 위해 정규직을 원하고 정규직이 되어도 자회사 전환 형식으로 결국 용역업체 기능을 수행하는. 무늬만 개인사업자일 뿐인 특수고용직노동자들. 고착화되는 사회경제적 신분차별. 말해지지 않는 것들. 그들은 말해지지 않으며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 목적론적 사관, 체제의 공고화가 정말로 폭력이라고 느낀다면, 몰락과 재구축의 맥락 속에 우리는 진정 ‘몰락 속에서의 행복’을 바라야하지 않을까. 빈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우리는 무엇을 답해야 할까. 



“누구는 대담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이 될 필요가 없고 될 수도 없다.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짐, 움직임이다. 익명의 바통이다. 그리고 그 바통 위에는 ‘끝나지 않았어’라는 말이 새겨져있다.”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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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1. 장 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2019년 7월 작성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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