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소해 Dec 04. 2019

'집창촌'의 발음법

미아리 텍사스와 청량리 588, 주차장들은 조용히 서있었다.

“총각, 놀러왔어?”

집창촌은 주차장의 이름을 하고 있다.


주어진 분유를 어릴 때부터 잘만 받아먹었다. 읽는 법과 말하는 법도 배웠다. 말하는 것에도 문법이 있나보다. 가이드라인에 빼곡히 굳어져 써내려진 글씨들은 표기법과 발음법이 있지만 정작 발음법과 발음이 상이하다. 글자는 읽어도 발음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단 생각을 종종 한다. 분명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있다.


아직 냉기가 꺼지지 않은 1월이었다. 밤 11시 반, 오이도 방향으로 가는 4호선 전철에서 내려 길음역 10번 출구로 향했다. 약속이라도 한 걸까. 사람들은 발을 맞춰 우르르 빠져나가며 어둑한 대로변을 따라걷는다. 


궁전주차장, 태양사주차장..


주차장이 수도 없이 대로변을 따라 늘어서있다. 어느 주차장 옆의 벽 한켠에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라고 붙어있다. 주차장 입구 쪽에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 앉은 아주머니 몇분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내가 조금 기웃거리자 바로 다가와 “총각, 놀러왔어?”라고 묻는다. 흔히 말하는 삐끼 아줌마였다. 어디를 지나가든 그 사람들은 그렇게 운을 뗐다. 성구매자들과 바람잡이들의 은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여기에 놀러왔던걸까.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가는 큰 거리다. 교복을 입은 학생 무리들도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는 내 옆으로 지나다녔다. 이어폰을 꽂은 채로. 혹은 추위에 빨개진 손으로 폰을 쥐고 통화하며. 혹은 잰걸음으로. 혹은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 않은 채로. 주차장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고개는 써내려진 흑백의 글씨들처럼 경직돼있었다. 다들 주차장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주차장이라고 읽고는 그저 걷는다. 주차장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주차장은 실용적이고 예쁜 단어고, 그렇게 언제고 읽기 좋은 단어로 남는다. 우리의 언어관습은 홍등가를 주차장으로 만들어 은폐시켰다.


대로변 모퉁이를 돌자마자 밑의 사진과 같이 붉은 조명 아래, 좁은 골목이 쭉 이어져있는데 양옆은 모두 집창촌이다. 일명 미아리 텍사스.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던 삐끼들은 내가 지나가자 내 주위로 모이며 호객행위를 한다. 어떤 한분은 자연스럽게, 또 완강하게 내 팔짱을 끼며 얘기한다. “어유 총각, 놀러왔어? 고등학생이야? 여기 들어와서 봐봐. 괜찮은 애들 많어.” 성착취 문화의 물리적인 모습과 공간은 그저 대로변 모퉁이에서 발음법이 손쉬운 단어로 나타났다. (‘성노동’에 대한 담론은 나에겐 조금더 생각할 부분들이 많다. 사실 지금까진 ‘성노동’이라는 단어보다는 ‘성착취’가 더 맞지 않나 생각해왔다. 그러나 성노동이라는 개념이 행위성을 드러내면서 피해자로서의 단일한 상을 거부하며,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젠더중립적이라 생각해왔던 ‘노동’을 문제시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에게 노동과 젠더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유효하다고 들었다.)


성매매에 관한 논의를 단순히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문제로 협소하게 보는 것은 폭력적이다. 예를 들자면 성매매특별법은 성구매자와 성판매자를 모두 처벌한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사회가 제공한 가이드라인에서 ‘성매매는 나쁜 것’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흥미롭게도 발음법에서는 성구매자의 존재는 사라진다. 성판매자만이 존재한다. 자발성의 논의 하에서 성매매 종사 여성에 대한 징벌이 구조의 문제를 대체한다. 구조에 대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마치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 아니면 ‘가해자’만의 이분법적인 문제로 인식하면서 여성혐오적 구조에 대한 성찰과 연대의 가능성은 도덕검열의 이름으로 지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온정적 차별주의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조용히 녹아들어있고 언어관습의 형태로, 주차장의 간판으로 발견된다.


승리, 정준영 단톡방 사건만을 보더라도 남성들의 강간문화, 남성들의 성구매 문화는 전혀 일탈적이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클럽 버닝썬 대표는 승리를 변호하면서 ‘승리의 3년 전 카톡 내용이 죄가 된다면 대한민국 남성들은 다 죄인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남성의 성구매 문화를 방증해버렸다. 피해자는 사냥하고, 구매자는 숨겨주는 문화. 성매매 여성만이 구조의 피해자가 되거나 더러운 창녀로 낙인찍힌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작년에 상경하면서부터 계속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사관에서 생활하는 중이다. 매학기 이맘때쯤, 항상 담임목사가 직접 학사관으로 찾아와 개강예배를 드리고는 한다. 담임목사는 설교의 도입부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설명하려고 뜬금없이 버닝썬 클럽 사건의 예시를 끼워넣는다. 늘 그렇듯 역시나 인자한 미소와 따뜻한 음성과 함께. “다들 요새 버닝썬 클럽 사건 아시죠?” 잠깐의 뜸을 들이고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버닝썬 약물 성폭행 피해자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등에 반짝이는 안경렌즈 너머의 자글자글한 눈이 구원받아야 할 학사생들의 가련한 영혼들을 응시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술을 즐겨했기 때문입니다.” 침묵. 따뜻한 설교가 이어진다.


너가 몸을 사렸으면 강간 당하지도 않았을텐데… 클럽에 다니는 여자들을 굳이 에둘러 설명해야하나? 헤픈 여자지. 몸 굴리러 간 거 아닌가. 1995년의 형법이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법조문에 써있는 발음법 그대로 책임의 소재를 피해자에게 돌리며 성폭행을 자발성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담임목사의 말에도 클럽의 여자들은 술과 향락을 즐기며 결국 정조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는 성매매 종사 여성에 대한 혐오와도 맞닿아있다. 


여기에 비슷한 맥락이 있다. 여성들이 생존의 문제에 대한 투쟁을 토해내고 있을 때, 이를 '민감한 년들의 푸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성폭력사건에는 관심이 많다. 맞다, 세상은 아직 참으로 온화하고 대한민국은 따뜻하다. 옳은 말이다. 주목받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다들 한마음으로 같이 분개하며 가해자를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이런 가슴 따뜻한 동기가 오히려 성차별구조를 공고히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화된 논의 속에서 젠더 수평성에 대한 맥락은 지워져버리고 가해자 개인 도덕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각해볼 점은 여성주의 흐름을 거부하는 이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발벗고 나선다. 하지만 실상 전쟁터 속에서 폭력으로 점철되는 여성의 삶의 문제와 여성주의 담론의 필요성에 공감하기보다는 민족주의적 정서에만 치중하거나 혹은 반일정서에 기반한 경우가 대다수다. 차별은 온화하게 다가오기에 우리는 항상 경직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게스투스 또한 마찬가지다. 온정적 차별의 문제는 곳곳에 퍼져있다. 가게 직원이 거동이 불편해 음식을 혼자서 먹을 수 없는 장애인에게 손수 천천히 음식을 먹여주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순수한 감탄과 동경의 눈빛, 그리고 약간의 박수갈채를 직원에게 보낸다. 직원은 ‘본받아야 할’ 사람이 되고 이 과정에서 왜 장애인에게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목소리는 소멸한다. 


그들은 왜 시설에서만 지낼 수밖에 없는가. 장애인의 탈시설 문제에 대한 고민은 부재한 채로, 장애인 시설 봉사를 갔다오고선 선량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문화시설이 즐비한 혜화의 대학로 거리를 쏘아다니면 당연하게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이 거리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경사로 또한 보이지 않는다. 발음법과 발음이 다른 곳에서 우리는 말의 실패에 무감각해지고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 또한 사라진다. 

 

궁전주차장. 간판의 글씨를 소리내어 읽는다. 우리가 감각하는 주체란, 소리내어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진 ‘나’란, 이데올로기와 문법에 의해 규정되는 구조의 담지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삐끼들이 즐비한 미아리 텍사스와 더불어 서울에는 유명한 집창촌이 몇 개 더 있다. 그중 하나가 청량리역 일대의 청량리 588이다. 한때 번성했던 청량리 홍등가는 이제 재개발에 들어서며 사라져가지만 우리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안다. 여전히 주차장 간판은 일상에 자리하고 여전히 발음은 어렵다.

작가의 이전글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