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그냥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봄의 식탁 3. 따뜻한 아메리카노

by 숨소하

몇 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늘 느끼는 감정은 '혼란스러움'이다. 너무 일상다반사적으로 느껴버린 이 감정은 어느새 세상에 공기가 있다는 사실처럼 내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이 되어 버렸다.


무얼 하는 게 맞는 건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맞는 건지 이제는 누구도 내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매일 끝이 보이지 않던 수험생활 끝 나를 마주한 것은 아주 잠깐의 자유와 드넓은 허무함이었다. 세상이라는 망망대해 속에 나는 던져졌다.


누구는 이제 AI를 배우지 않으면 뒤쳐지는 시대라고 한다. 인터넷 댓글 창을 열면 이 나라는 이제 망했다고 하고. 또 SNS를 열면 지금 당장 계정을 만들어 시작하라고 한다.

매일 같이 대단한 사람들을 아주 쉽게 마주한다. 어린 나이부터 외모가 뛰어나 TV에 나오는 연예인들, 재미로 올린 영상이 대박이 터진 유튜버들, 집에서 쉽게 번다는 인플루언서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벌써 대단한 학위를 따는 사람들. 세상에는 나만 두고 전부 잘난 것 같은 사람이 넘쳐난다.


역설적으로 할 일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 걸 잔뜩 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잘 해내야 할 것 같다. 잘난 사람들은 자기가 집중할 걸 알아서 잘나게 된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어느 하나에서라도 뒤쳐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러다 결국 상상만으로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된다.


나는 글 하나를 꾸준히 적어 올리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또 비관적인 마음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은 왜 이리 나만 빼고 다 대단해 보이는 건지-


이제는 완연한 봄이 다가왔다. 새 학기, 새 출발이라는 말을 어쩐지 품고 있는 것만 같은 계절, 봄. 봄에는 의욕이 나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또 금세 그만두기 일쑤다. 이번 봄도 역시 그랬다. 짧은 계절 동안 벌써 몇 번의 시작을 하고 끝을 맞았는지 모른다.


꽃들도 하나씩 활짝 피고 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기온은 아직 서늘하다. 낮에는 반팔을 입고 다니다가도 저녁엔 꼭 잠바를 챙겨 입게 된다.


봄에는 헬스장에 가는 횟수가 확연히 준다. 날씨가 좋을 때는 실내보다 밖에서 자연을 느끼고 싶은 마음.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좋은 날씨를 맘껏 누리고 싶다.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는 대신 오늘도 벚꽃이 가득한 하천길 걷기를 선택했다.


봄의 장점이라 하면, 언제나 걸을 수 있다는 것. 늘 허무함과 혼란스러움 사이에서 나는 싸우고 있지만 봄에는 실컷 걸을 수 있다. 복잡한 머릿속을 그저 걸으며 비워낼 수 있다. 여전히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지만 걸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삶의 많은 부분이 단순해진다.


이번 봄에는 많은 것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에는 잘 일어나기, 밥을 잘 챙겨 먹기, 매일 꽃을 보며 산책하기, 저녁에는 잘 자기. 단순한 삶의 루틴에서 나는 자꾸 생각하고 복잡해지려고 한다. 그저 그럴 때마다 다시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걷고 또 걷는다.


날씨가 아직 덜 풀린 봄밤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어울린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기에는 아직 추운 계절이다. 바람은 살짝 서늘해도 손 안은 따뜻한 감각이 좋다. 이번 계절에는 실컷 걸으며 너무 많은 걸 잘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겠다. 전부 해내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고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겠다. 남의 것을 욕심낸 나머지 그들의 발끝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탓하기 전에,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더 돌아봐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봄밤과 벚꽃, 조용한 물소리, 그리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