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욕망과 가혹한 운명 사이, 에비타

14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에비타, ‘인간 에비타’를 마주하다

by 이소희



전 세계를 사로잡은 마스터피스, 뮤지컬 <에비타>가 14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았다. 아르헨티나엔 신화와 같은 한 여인 에비타가 있다. 그는 한 나라의 경제를 망친 악녀인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던 악녀인지 지금까지도 에비타를 향한 해석은 분분하다.


애니메이션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는 돈을 벌러 떠난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향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유럽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이주할 만큼 부유한 기회의 땅이었다. 그 풍요와 혼돈의 중심에 '에바 페론='이 있었다. 성녀와 악녀, 혁명가와 포퓰리스트. 양극단의 평가를 동시에 받는 그녀의 삶이 14년 만에 한국 무대로 돌아왔다.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에비타>는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를 타 넘으려 했던 한 인간의 의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거장이 빚어낸 마스터피스, 14년의 기다림

뮤지컬 <에비타>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오페라의 유령> 등을 탄생시킨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 콤비의 역작이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어지는 성스루(Sung-through) 형식은 인물의 감정을 끊김 없이 전달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이번 공연은 2011년 재연 이후 무려 14년 만의 귀환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작품은 단순히 과거의 재현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 관객에게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세련된 프로덕션으로 재탄생했다.



채움보다 강렬했던 '비움'의 미학


무대 위에는 화려한 궁전도, 사치스러운 장식도 없었다. 홍승희 연출은 과감한 미니멀리즘을 택했다. 공사판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철골 구조물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앙상한 뼈대 같은 무대를 채우는 것은 오로지 배우들의 에너지다. 앙상블은 철골 구조물 사이에서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와 군중이 되어 끊임없이 움직인다. 에비타 역시 그 틈바구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 그녀가 결코 민중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낸 영리한 연출이다.


특히 2막의 하이라이트인 ‘Don't Cry for Me Argentina’ 장면은 압권이었다. 영화 <에비타>에서 마돈나가 부르며 전설로 회자되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 넘버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 곡이다. 연출은 이 거대한 명곡 앞에서 기교를 부리는 대신 정공법을 택했다. 무대 뒤편과 앙상블이 검은 천 뒤로 사라지고, 오직 에비타와 관객만이 어둠 속에 남겨진다. 시각적 정보를 모두 소거한 채, 배우의 목소리와 감정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만든 이 장면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렬한 누아르적 미장센을 완성했다.



19년의 시간을 건너 완성된 '살아있는 에비타', 김소향


이번 시즌, 에비타 역의 김소향은 그야말로 '무대 위의 지배자'였다. 그녀에게 이번 무대는 단순한 배역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9년 전 초연 당시, 그녀는 에비타가 아니었다. 후안 페론의 애인 역이자 앙상블이었으며, 에비타의 커버였다. 무대 옆에서 언니들의 연기를 지켜보며 남몰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꿈꿨던 그녀는, 19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 마침내 무대 중앙에 섰다.


스스로를 "살아있는 에바"라 칭할 만큼, 그녀는 에비타의 생애를 깊숙이 체화하고 있었다. 작은 배역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온 그녀의 배우 인생은 밑바닥에서 퍼스트레이디까지 오른 에바 페론의 삶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김소향은 성공을 위해 남자를 유혹할 때는 요염한 고양이 같았고, 혁명의 깃발을 들 때는 포효하는 사자 같았다.


"열정을 무기로 삼아 달렸던 여자." 김소향이 해석한 에비타는 권력에 취한 독재자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한 만큼이나 아르헨티나 국민을 뜨겁게 사랑했던 신념의 인물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꽃도 결국 시들어가듯, 병마 앞에 무너져가는 인간적인 면모를 표현할 때 19년의 내공은 빛을 발했다. 강인했지만 끝내 운명 앞에 스러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그녀가 왜 '완전한 에비타'인지를 증명했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후안 페론 역의 윤형렬은 묵직한 저음과 특유의 존재감으로 극의 중심을 잡았다. 폭주하는 에비타의 에너지 옆에서 그는 단단한 거목처럼 서서, 이 드라마틱한 여정이 현실에 발붙일 수 있도록 균형을 맞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


역사 속 인물을 다룬 작품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박제된 과거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치열했던 삶을 통해 현재를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함일 것이다. 뮤지컬 <에비타>는 화려한 퍼스트레이디의 신화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고뇌와 투쟁을 생생하게 복원해 냈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낸 에비타의 삶은 2025년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비록 그 끝이 비극일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녀의 생애는 무기력한 시대를 건너는 우리에게 뜨거운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고 졌던, 그러나 영원히 기억될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본다. 에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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