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의 화가가 오늘의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시대를 건너 마주한 위로

by 이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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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는 인문학의 꽃이다.


추천사를 읽다 이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왜 나는 예술을 좋아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예술에서 위로를 받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 있었다. 미술은 예쁜 걸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니까.


우진영 미술사학자의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는 그 '사람 이야기'를 한다. 작품을 학술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술 작품과 자기 삶을 겹쳐놓고,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본다.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알게 된다. 이 사람은 모든 걸 따뜻하게 바라보는구나. 섬세한 감성과 깊은 공부가 만나서, 글이 진짜처럼 읽힌다.



경성에서 서울까지, 100년을 잇는다

이 책이 재밌는 건 '연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예술가들의 고민이, 2025년 서울을 사는 지금 예술가들의 고민과 닮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총 5부에 걸쳐 47명의 예술가를 엮었다. 여성 편견에 맞선 나혜석과 현대의 이재헌,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은 김환기와 손승범. 시대는 달라도 삶의 본질을 표현하려던 마음은 100년을 건너 겹쳐진다. 나는 1부 '나와 당신의 도시'에 나오는 김주경과 정영주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1927년의 설렘, 2023년의 그리움

도시는 시대마다 다른 얼굴을 한다. 여기 두 개의 '서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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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경이 1927년에 그린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변화하는 경성의 활기가 담겨 있다. 1920년대 말 서울엔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며 근대 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주경은 유화로 이 낯선 풍경을 자신감 있게 담았다. 붉은 양산을 쓰고 흰 원피스 입은 신여성이 뒷모습으로 걸어간다. 그 걸음걸이에서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호기심이 느껴진다. 경쾌하고 생동감 있다.


100년쯤 지난 2023년 서울을 그리는 정영주의 시선은 다르다. 김주경에게 콘크리트 빌딩이 '설레는 변화'였다면, 지금 우리에게 빌딩 숲은 차갑고 피곤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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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의 <도시-사라지는 풍경 531>(2020)은 화려한 마천루 대신 산동네 판잣집을 본다. 캔버스에 구겨진 한지를 켜켜이 붙여서(파피에 콜레) 허름한 집들을 짓고, 거기 따뜻한 불빛을 켠다. 버려진 것 같은 판잣집들이 어쩐지 도시 구석에 웅크린 우리 같아서 서글프다. 하지만 작가는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한다.



사라지는 것들의 안부

저자가 갤러리에서 정영주의 그림을 봤던 순간을 털어놓는다. 직장 업무에 지쳐 있던 여름날, "또 다른 세계(Another World)"라는 전시 제목이 공허하게 느껴졌던 K-직장인의 마음이 무너지던 순간. 잿빛 판잣집 사이 노란 불빛이 번지면서, 차가운 에어컨 바람 아래 식어버린 마음이 다시 몽글거렸다고.


김주경이 근대 도시의 '새로움'에 매료되었다면, 정영주는 도시의 시계를 되돌려 '사라지는 것'들의 상처를 만진다. 김주경 그림 속 신여성이 걷던 그 길 위에서, 지금 우리는 정영주의 불빛을 그리워한다.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는 캔버스 너머의 시간을 잇는다. 근대 작가의 치열한 삶이 현대 작가 내면과 울리고, 그게 다시 독자한테 온다. 도시 생활이 괴롭거나, 지나간 어제가 아쉬우면 이 책을 펼쳐보면 좋겠다.


100년 전 화가와 지금 화가가 건네는 위로가, 당신 안부를 묻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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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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