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천국에 울려 퍼진 춤사위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by 이소희


11년의 역사와 매진 신화, 한국 창작발레로 만나는 안중근







20260318173618_ohwcxrya.jpg?type=w1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름, 안중근. 그는 이미 수많은 예술 장르의 소재가 되어왔다. 가장 대중적인 뮤지컬 〈영웅〉부터 영화, 소설까지. 그런데 이번엔 발레다. 역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인 '대사'가 없는, 오직 몸으로만 말하는 발레에서 안중근을 표현한다니. 이 복잡하고 무거운 역사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을 안고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2015년 무용창작산실 우수작품으로 초연된 이후 올해로 창작 11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 대표 창작발레다. (사)안중근의사숭모회·안중근의사기념관이 주최하고 M발레단이 주관하며, 국가보훈부가 후원한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 수입에 의존해온 한국 발레계의 현실 속에서, 이 작품은 꾸준한 재창작과 관객의 호응을 통해 안정적인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보기 드문 성공 사례다. 2022년 제12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고, 2024·2025년 서울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이어 매진을 기록한 이 작품은 올해 광주·서울·대구 3개 도시 투어로 무대를 확장했다.


서울에서는 단 이틀, 광주와 대구에서는 하루만 공연이 진행되어, 더 소중하고 값진 자리였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무용

발레로 이 이야기가 온전히 전달이 될까. 혹여나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몰입력과 전달력은 훌륭했다. 배우들이 표현하는 몸의 움직임 안에 이야기가 담겨있었고,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들이 표현하는 강도, 속도, 표현에 따라 캐릭터의 성격이 달라지고,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달라지고, 순간순간 인물의 감정이 달라졌다.


20260318175624_cimlufse.jpg


안중근의 움직임은 절도 있고 절제되어 있으며, 어딘가 비장한 데가 있어 단 번에 '그 구나.' 알 수 있었다. 일본군 장교 이시다는 힘 있고 세차게 표현되었으며,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는 우아하고 기품 있게 움직였다. 이시다의 여인 사쿠라는 매혹적이고 유혹하는 듯한 뉘앙스로 무용을 이어갔다. 말 한마디 없이도 각 인물의 내면이 무대 위에서 선명하게 구분된다. 이것이 발레가 가진 힘이었다.


20260318175402_cubhbytf.jpg


장면 중간 중간엔 여자 무용수들이 나와서 군무를 펼치고, 남자 무용수들이 나와서 군무를 펼친다. 발레 공연은 역시 무용수들이 함께 나와 군무를 맞출 때 비로소 빛이 난다. 아름다운 선과 표현들이, 순간순간 행복하게 만들었다.


20260318175941_skqduuwi.jpg


안중근이 의병부대를 조직해 국내진입작전을 하는 장면에서는 안중근의 의병들, 독립군들이 무대 아래로 이어진 장치를 타고 슬라이딩으로 뛰어 내려가고, 포복하며 뛰어 올라왔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공간을 무대로 만드는 연출.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무대와 객석의 높낮이를 없애는 연출은 몰입감이 상당했고, 실제 전투 현장처럼 긴박하게 느껴졌다.


20260318173736_teigmcyv.jpg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 장면은 무용이 도달할 수 있는 표현의 정점이었다. 일본군과 의병대 두 집단이 앞뒤로 교차하며 군무를 펼치는 그 구성은 전투의 긴장과 혼돈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 작품이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듬어 온 세월과 연륜의 흔적이 느껴졌다. 실제로 M발레단의 군무진은 다년간 함께 호흡하며 이 작품을 체화해온 무용수들로 구성되었다. 올해 공연에서는 기존보다 일본군의 인원을 늘려 더욱 긴박한 훈련·전투 장면을 완성했다고 한다. 어쩌면 움직임이 대사나 묘사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 장면에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20260318173751_tytoykzx.jpg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명의 동지들과 왼손 약지 첫 관절을 잘라 대한독립을 약속하는 단지동맹을 맺는다. 이 역사적 사실 무대 위 안무로 옮겨졌던 장면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무용수들은 모두가 나란히 약지를 살짝 굽혀 보여 머리 위로 드는 것으로 서약했고, 그 작고 고요한 제스처 하나가, 말보다 훨씬 무거운 결의를 품고 있었다. 이어지는 안무에서 그들은 서로의 손과 손을 잡고, 어깨를 잡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통일된 몸짓으로 연결된 채 당차게 나아가는 그 모습은,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다짐을 온몸으로 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들의 힘과 의지가 춤의 언어로 또렷하게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하얼빈 역으로 기차가 힘차게 달리고 이윽고 멈춘 기차에서 이토가 내렸다. 그 순간 들린 세 발의 총성, 안중근이 처음 입을 열어 외친다.


"코레아 우라! 우라! 우라!" 발레 공연 내내 침묵하던 안중근이 처음 내뱉은 그 한마디는 가슴 한 가운데에 불을 지폈다. 언어를 철저히 절제해온 공연이었기에, 그 우렁찬 외침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축적된 감정의 폭발로 들렸다. 몸으로만 말해왔던 안중근이 비로소 목소리를 내는 그 순간, 관객은 단순히 역사적 의거를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임을 몸소 보여줬다. 발레 공연 자체가 침묵이었기 때문에, 그 외침은 훨씬 깊이 느껴졌다.


마지막, 안중근의 어머니가 안중근에게 말을 건넨다.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대의를 위해 죽어라."


살려달라 빌지 말라, 아들에게 죽음을 명하는 어머니. 그 장면에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말이 잔인하지 않고 안타깝게 다가왔던 것은, 그것이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아들을, 끝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세우는 어머니의 말이 있었기에 안중근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사형장으로 가기 전, 안중근은 당당하게 외친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 유언이 작품의 핵심 모티브다. 추가 '안중근 의사 역시 기쁨의 순간에 춤을 추었을 것'이라는 사유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두고도 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꿈꿨던 한 사람의 삶을 발레의 몸짓으로 헌정한다.


20260318175107_khfqxukc.jpg


커튼콜 때, 안중근 역의 윤전일 무용수가 무대 밑으로 내려와 태극기를 들어 힘껏 펄럭였다. 아련하고, 벅차올랐다. 마치 안중근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저렇게 당당하게 우리나라의 국기를 들었을까. 마지막까지 마음이 뭉클했다. 우리 대한민국, 이렇게 지켜졌구나.


역사책이나 뮤지컬에서 보았던 안중근을 발레로 만나니 더욱 감성적으로 다가왔고, 그의 마음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몸으로만 표현하기에 안중근의 생각을 헤어리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말로 다 할 수 없던 감정들이, 몸의 언어로 직관적으로. 조용하게 전해졌다. 말보다 더 한 감동이 있던 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이었다.


한국 창작발레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할 때, 11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이 무대가 국내를 넘어 세계 무대로 나아가기를, 그리고 더 많은 관객이 이 몸짓의 언어를 마주하기를 바란다.


20260318175316_vkmtufpt.jpg






작가의 이전글살아내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