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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쓸 수 있다는 말

<< 글의 씨앗을 던져준 사람 - 2 >> 김 작가님

by 빛나는

오랜만에 대학교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대뜸 내일 뭐 하냐고 물었다. 뚜렷한 일정이 없는 애 엄마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회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규모의 강연인데 진행자가 펑크를 냈다며 제발 와달라 애원하듯 말했다. 대본은 다 준비되어 있으니 깔끔한 옷만 입고 오면 된다며.


다음날, 옷장 깊숙이 숨어있는 재킷을 꺼내 입고 문화센터로 향했다. 받아 든 대본에는 형식적인 문장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단어는 '애순이'였다. 맥락을 보아하니 인기리 방영된 드라마에서 문학소녀로 등장한 인물 같았다. TV를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스쳤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운영진 틈에 조용히 앉아서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사람들 앞에 서려니 적은 인원임에도 심장이 뛰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늘 강의를 맡은 작가님이었다.


"사회를 봐주시기로 했다고요, 너무 감사드려요."

체구는 작았지만 강렬한 눈빛을 가진 분이었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어제의 급박한 상황을 말해주는 듯했다. '아녜요, 이 일이 아니었으면 하루가 무료할 뻔했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입 밖으로는 수줍은 '네...'만 겨우 나왔다.


강연의 주제는 뜻밖에도 '시'였다. 받은 대본에는 '문학'이라고만 적혀있어서 당연히 소설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설픈 마무리를 할 수는 없으니 볼펜을 들고 강의에 집중했다. 간략하게 시 문학의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주제별 추천 작품을 소개해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작가님이 해 준 작품들은 내가 알던 '시'라는 틀을 완전히 깨트렸다. 가장 운이 남았던 건 고영민의 「계란 한 판」이었다. 그 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화려한 비유 없이 담백한 단어만으로도 이런 큰 울림을 주다니. 감동스러운 강연이 끝나고 작가님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묵직하게 남았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어요."

나눠준 동아리 신청서를 받아 들고 홀린 듯이 이름을 적었다. 그렇게 나는 월요일마다 병아리 시인이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작가님은 첫 동아리 모임에서 나를 세미나 사회를 맡아준 사람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담아 소개했다. 어린 아기를 키우면서도 시에 열정을 보인다며 띄워주었다. 내가 이과생이었다는 말에 크게 놀라 시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분야라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할머니의 감자볶음'을 주제로 써간 어설픈 나의 작품에도 감탄하며, 그동안 왜 글을 쓰지 않았냐고 손뼉을 쳐주었다. 작가님한 마디를 할 때마다 나는 둥둥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따끔한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초보자일수록 맞춤법을 지켜야 하고, 멋있는 척하는 군더더기는 모두 빼라고 말했다. 시적 허용이라는 말 뒤에 숨어 '어디 한 번 내 뜻을 맞춰봐라.'는 식으로 쓰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쓰고 끊임없이 퇴고하며 여운을 남기게끔 수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가벼운 취미로 시작했지만 시를 배워가는 과정은 혹독한 훈련을 받는 거나 다름없었다.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내고 일요일 밤이 되면 어떻게 든 한 편을 지어내려 머리를 쥐어뜯었다. 월요일 아침이 되어 허둥지둥 써가면 어김없이 예리한 화살이 날아왔다.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가끔은 매서운 채찍을 휘두르는 작가님 앞에서 나는 순한 삐약이가 되었다.


작가님의 열정적인 가르침은 안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모임에 참여할수록 시가 어렵다는 생각이 점점 날아갔다. 호기롭게 창작시를 공개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브런치북을 만들었다. 혹시라도 읽는 분들이 무슨 뜻인지 모를까 걱정이 되어 짧은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아직은 소심한 햇병아리니까.


무더운 날 시작한 모임은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주 과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창작의 고통은 여전하지만, 영감이 번뜩이는 순간이 주는 기쁨이 더욱 크다. 힘겹게 써간 작품을 발표 한 뒤, 문우님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오면 대문호가 된 듯 어깨가 절로 솟는다. 살짝 돋아난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걷는 길이 참 즐겁다.


처음엔 낯간지러웠던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 제는 믿을 수밖에 없다.


https://brunch.co.kr/brunchbook/sohee-dica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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