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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희 Aug 24. 2021

장진호 노병을 위한 1만불 기부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보며 흥남철수를 떠올리다 (이미지 :인터넷 검색)

기억은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고 어떤 이에게는 고통이다. 전쟁을 겪은 기억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아마도 눈물일지 모른다.


 커피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K선생님은 몇 주 전에 내가 쓴 칼럼 ‘장진호 노병을 만나러 가는 길’이 실린 신문을 비닐 홀더에 곱게 간직하고 계셨다. 흥남에서 미군들을 따라 배를 타고 남한으로 피란을 나왔다는 그분의 기억은 피란민 틈에 섞여 배에 오르던 그 시각에서 멈춘 듯했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고향 생각이 더 짙어진다고 울먹이셨다. 미군 철수로 사람들이 수송선에 매달리던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던 그분에게 전쟁은 마음 어딘가 고여 있는 눈물이었다.


미군 항공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아프칸사람들 (이미지 :인터넷 검색)

 자신의 아버지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던 셔메인의 기억도 눈물이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는 핸드폰 너머의 그녀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묻어있었다. 포로로 잡힌 후 자신의 아버지가 작은 상자에 갇혀 3개월을 지냈다던 설명이 꽤 길게 이어졌다. 영어가 서툴러서 주로 이메일로만 소통했던 내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아프카니스탄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을 즈음 나는 익명의 한 독지가를 만나러 토런스로 향했다. 누군가 내 글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고 선뜻 후원을 하겠다는 연락은 장진호에서 빠져나오던 병사들 머리 위를 비추던 별빛보다 더 신비했다.

독지가의 1만불의 기부는 피란민을 대표하는 보은이다.

 한사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길 원치 않던 독지가는 장진호 노병들에게 건네라고 체크를 써주셨다. 그분이 주신 1만 달러는 한국인을 위해 피를 흘린 미군들의 희생에 대한 보은이었다.


 Army Chapter Chosin Few앞으로 발행된 체크, 어떤 과장도 허세도 없이 건네받은 수표다. 그래서 그런 가, 종이 한 장의 무게는 아주 가벼웠다. 하나, 둘, 셋, 넷. 0이 네 개다. 만 달러라는 체크를 처음 본 나는 몇 번을 들여다보고 눈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아무 조건도 없는 수표에 흥분한 건 오히려 나였다. 콜로라도 덴버에 살고 있는 셔메인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를 타고 미조리주에 도착하기 전에 재무를 담당하고 있는 그녀의 고민을 하루빨리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2019년 장진호전투 생존자 모임에서 만난 셔메인과 그의 모친과 함께

 2년 전,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를 만나러 미조리주 스프링필드에 갔을 때 나는 빈손이었다. 비행기표와 호텔비를 마련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어서 선물을 준비한다는 건 꿈도 꾸질 못했다. 이번엔 후원금 덕분에 쭈뼛거리지 않아도 된다. 내 전화를 받고 기뻐하기는 셔메인도 마찬가지다. 그 기부금으로 참석하는 노병들에게 하고 싶었던 몇 가지 일을 하게 되었노라고. 그러면서 포로 교환 때 풀려났던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도 나처럼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데, 전쟁군인이었던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리는데, 샤메인은 아버지에 대한 어떤 기억이 눈물처럼 고이는지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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