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소희 Sep 26. 2015

아버지의 무공훈장

도달할 수 없는 그곳

독박골.

 내가 살던 동네 이름이다. 불광동이라는 이름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박골로 더 잘 통했다. 돌이 많아 독박골이 되었다는 그 지역은 무허가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가난했다. 하루에 한 차례씩 트럭을 타고 남자들이 몰려와 블럭집을 망치로 부수고는 사라졌다. 집달이를 붙들고 울부짖는 아줌마의 엉클어진 머리카락과 술 취한 어른들이 멱살을 잡고 싸우는 건 아주 흔한 구경거리였다.

 조그만 마당에 보라색 라일락 나무만 그럴듯하게 피었을 뿐 단독주택이라 해도 우리 집도 그들처럼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손바닥만한 마당 한 가운데 세워진 라일락 나무 말고 우리 집 살림에 어울리지 않게 걸려있는 액자가 있었다. 그 액자 안에는‘무공 수훈장’이 들어있었다.


 초라한 벽면에 걸려있던 액자는 가난한 살림에 파묻혀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질 못했다. 가난의 질곡이 어떻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 난 그 시끄럽고 고상하지 못한 동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결혼과 동시에 한국을 떠나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아야 했던 나는 폐암으로 보훈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의 앙상한 뼈마디를 보면서도 마지막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현충원에서 있는 안장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행사 식순에 의해 아버지의 유골가루를 담은 단지를 안고 들어서는 어머니, 국화꽃 화환 앞에 놓여 진 향불, 장교들의 선열에 대한 정중한 경례, 절도 있는 의장대의 행렬. 파란 하늘을 가르는 트럼펫 소리는 가슴 밑바닥에서 무겁게 머물렀다. 

 아버지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난 한 번도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질 못했는데 국가는 아버지의 공을 장엄하게 예우했다. 회한이 몰려와 견딜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참전해야 했던 용기는 내게 대수롭지 않았고, 전쟁 통에 졸업장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제대 군인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맛봐야했던 좌절이 어떤 건지 관심도 없었다. 군대를 떠났지만 지휘관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자존심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농부들이 주먹밥을 운반해오면 먹고 안 가져오면 굶고, 설사 가져와도 이미 삭아버린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며 싸워야 했던 20살도 안 되는 어린 청년의 걱정은 오로지 조국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죽어있는 흑인의 배창자를 모르고 밟아 온 몸에 썩은 송장내를 풍기면서도 행군을 계속해야했다던 무용담은 발가락 사이에 무좀파우더를 뿌리는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허리처럼 보잘 것 없이 들렸다.


 세월은 흘러 독박골을 가로지르던 큰 개천은 복개되어 구기터널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가 만들어졌다. 개천 양옆으로 들어섰던 무허가 건물들은 다 없어지고 봄이면 개나리꽃이 지천으로 만발하는 전망 좋은 곳으로 변했다. 그리고 어머니 혼자 오도카니 살고 있는 그 집도 재개발지역으로 조만간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오월이면 향내가 진동하던 라일락 나무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울적해졌다.


 지금은 국가 유공자에 대한 대우가 많이 좋아졌다. 돌아가신 아버지 덕택에 어머니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아버지께서 젊은 날 고생한 대가를 혼자 누리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전화만 걸면 울먹이셨다.

 계롱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산세를 좌우로 깨끗하게 단장이 된 현충원은 햇빛이 고르게 퍼졌다. ‘육군 대위 권만중’이라고 쓴 비석을 손을 쓰다듬는 손길 위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무공 수훈장은 묵은 살림살이가 빼곡히 들어찬 안방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으로 인해 원망의 재를 뒤집어 써야했던 훈장은 아버지가 남긴 진실이고 내가 평생 글로 갚아야 할 빚이다.

 유월이 되면, 정말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