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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콩 Apr 12. 2023

지지향에서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지지향'이라는 숙소에 갔다 왔다. 지지향은 '종이의 고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출발 이틀 전 야간근무 중 문득 며칠간만이라도 고요히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만한 곳은 파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헤이리 마을에 있는 '모티프원'이라는 숙소도 눈여겨봐 두긴 했는데 현금이 있어야 했다. 다음 달까지의 생활비가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신용카드 결제가 되는 숙소를 찾다 보니 지지향이 나왔다. 하룻밤 자는 데 팔만 원이 넘긴 했지만 모티프원보단 저렴했다. 게다가 24시간 로비에서 책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근무 내내 고민하다가 동기 오빠에게 의견을 구했다. 오빠는 다녀오라고 했고(내가 그렇게 대답하도록 유도했다.) 나는 그 핑계로 숙소를 덜컥 예약했다. 집에서 잠깐 눈만 붙이고 바로 출발해야 했다. 체크인은 3시였는데 몸이 달아서 2시 전에 숙소에 도착했다. 여러 블로그에서 본 그대로 로비는 거대한 도서관을 겸한 카페 같았다. 책에 둘러싸인 기분이라 첫인상이 좋았다. 이틀 동안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소란한 마음

며칠 동안 카페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요즘은 집에서 휴대폰을 꺼놓으려고 노력 중이다. 24시간 로그온 되어있는 삶에 문득 피로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지향에 갔다 온 것도 그 피로감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내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 외딴곳에 있으면 읽고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식구들이 눈을 뜨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에 티브이를 켜놓는 집이다. 엄마가 설거지를 할 때나 빨래를 널 때 내가 리모컨으로 전원을 꺼버리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려다가도 좀이 쑤셔 거실로 나온다. 휴대폰에, 티브이에 온 신경을 빼앗겨 있다 보면 몇 시간이 후딱 간다. 그렇게 또 하루가 금세 저문다. 쉬는 시간마저도 인터넷에 정신을 빼앗기는 삶, 이 반복적인 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로는 처음이었다. 고속도로까진 아니어도 속도제한이 90인 도로는 처음 타보았다. 갈 때 운전은 예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지만 다시 차를 가지고 집에 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책을 읽어도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티맵 어플을 들락날락거렸다. 어떤 시간대에 차가 가장 없을지 계산해 봤던 것이다. 이랬을 거면 차라리 차를 두고 갔다 올 걸 그랬다.


집 나오니 숨 쉬는 것도 돈

날숨에 동전이 뱉어져 나오는 건 아닐까? 바깥에선 숨 쉬는 것마저 돈인 기분이다. 숙소비 팔만 팔천 원에는 조식 값도 포함된 줄 알았다. 체크인할 때 나눠준 종이에 조식은 미리 예약하라고 쓰여있어 카운터에 말했더니 조식 값 만 천 원을 더 내라고 했다. 금액을 듣고 안 먹겠다고 하기가 민망해서 카드를 내밀었다. 아침에 식당엘 갔더니 빵을 먹을 건지 밥을 먹을 건지 선택하라고 했다. '둘 다 먹으면 안 되는 건가?' 의아했지만 빵식을 먹겠다고 했다. 사장님은 주중엔 투숙객이 많지 않아 빵을 뷔페 형식으로 제공하진 않는다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 식사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샐러드와 계란후라이, 구운 두부와 구운 식빵 두 장이 나왔다. 아침에 먹기에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만 천 원의 퀄리티는 아니었다. 이미 낸 돈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파주출판도시엔 밥집이 많이 없다. 숙소에서 가까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감바스 알리오 올리오를 주문했는데 만 육천 원이었다. 손바닥만 한 양의 스파게티가 커다란 접시에 나왔다. 다 먹었는데도 속이 허전해 근처 파스쿠찌에서 뀐아망을 주문해 먹었다. 다행히 지지향 로비(문발 살롱)를 포함한 '지혜의 숲'이라는 공간에선 음료를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앉아있을 수 있었다.


함께하고 싶어

어릴 때부터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내는 아이이고 싶었다. 그건 내가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기 때문일 테다.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거나 그 감각에 적응하고 싶어서 갖은 노력을 다해왔다. 일부러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봤다. 여행도 혼자 다녔다. 누군가와 늘 함께 있는 삶은 내겐 너무나 요원해 보였다. 언젠가 혼자가 될 그 순간에 나는 너무 두렵고 막막하고 싶지 않아서 미리 예행연습을 해왔다. 숙소를 예약하기 전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방에 싱글 침대가 두 개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좁더라도 침대가 하나라면 덜 외로울 것 같았다. 408호를 배정받고 객실에 가봤다. 널찍했다. 조금 누워있다가 나는 친구들에게 "나 파주에 있는데 침대가 하나 남아. 놀러 오고 싶으면 놀러 와도 돼."라고 카톡을 남겼다. '선택은 너의 자유지만 네가 꼭 와주었으면 좋겠어.'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평일이라 다들 회사에 가야 한다고 했다. 못내 아쉬웠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때우는 식으로 보내긴 싫었지만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은 억누르지 못했다. 밤에는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럼에도 지지향은 좋은 곳이다. 하루 종일 문발 살롱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다음엔 가족과 함께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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