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은행에서 바라본 공공 디자인의 역할과 중요성
영란은행 UX 디자이너라 하면 흔히 로고, 웹사이트, 혹은 영란은행에서 발표하는 차트를 디자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디자인 팀이 담당하는 업무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한 나라의 중앙은행과 접점이 있는 모든 사용자의 경험을 더욱 편리하게 디자인하는 것은 생각보다 웹 사이트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계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 시민이 영란은행 웹사이트를 들어가기도 하지만, 영국의 수많은 상업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 금리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온 애널리스트, 혹은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 직원들, 심지어 영란은행 안에서 근무하는 직원 등 여러 사용자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은행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보건복지부, 대법원 등 다른 정부 기관에도 동일하다. 정부 기관에서도 디자인이 필요한 곳은 공식 웹사이트나 브랜딩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아쉽게도 IT 기업의 UX 디자이너는 익숙하지만 대법원 UX 디자이너, 금감원 UX 디자이너는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것과 마찬가지다.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디자인 선진국만 해도 공공 기관에 디자인을 도입한 지 꽤 오래됐다. 영국의 보건복지부인 NHS는 1940년대부터 디자이너들이 간판이나 브로셔 등을 디자인했고, 1943년에는 산업디자인국(Design Research Unit)을 만들어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을 아우르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우리에게 가장 알려진 디자인국의 프로젝트는 런던 지하철(영국식 영어로는 'Tube - 튜브'라 불린다)의 정보시스템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1940년에 시작한 덕분인지 영국 정부는 현재 각 부서별로 디자인 팀이 존재하고, 영국 정부의 커리어 페이지에서 나오는 디자인 관련 직업은 무려 322개나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공 디자인'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무엇일까. 디자이너마다, 혹은 나라마다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공공 디자인의 정의를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약칭: 공공디자인법)에서 정의했다.
“공공디자인”이란 일반 공중을 위하여 국가, 지방자치단체, 「지방공기업법」에 따른 지방공기업,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른 공공기관(이하 “국가기관등”이라 한다)이 조성ㆍ제작ㆍ설치ㆍ운영 또는 관리하는 공공시설물등에 대하여 공공성과 심미성 향상을 위하여 디자인하는 행위 및 그 결과물을 말한다.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이 외에도 2014년부터 행정안전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과 협력하여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공무원과 디자이너가 협력해 시민의 목소리를 정책과 공공 서비스에 반영하기 위해 디자인 씽킹과 서비스 디자인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에 대해 딱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 힘든 것 같다. 디자인 리더 크리스찬 베이슨(Christian Bason)은 2017년에 그의 박사 논문에 공공 디자인에 대해 정의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도 디자인에 대한 범위와 정의가 유동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정부 기관에서 전반적인 디자인(‘Design in government’)이라고 조금 더 광범위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팀만 하더라도 UX 디자이너, 서비스 디자이너, 유저 리서처, 콘텐츠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군이 존재하는데 이를 특정하여 공공 디자인이라고 정의하기 조금 모호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런 광범위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란은행에 근무하면서 느낀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공공 디자인은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기에 ‘사용자 중심(user-centred) 디자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접근성(accessibility)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둔다는 것이다. 공공 기관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정말 모두가 사용하는 서비스이기에 나이가 많은 사람도, 컴퓨터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어린아이도, 심지어 색맹인 사람까지 사용하기 편해야 된다. 이를 UX 디자인에 적용하자면 웹 접근성을 고려한 컬러 시스템을 만들어야 되고, 스크린리더가 읽을 수 있는 정보 아키텍처를 설계해야 되며,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UX 카피를 작성해야 된다. 그리고 이를 서비스 디자이너, 혹은 유저 리서처가 해석하면 더욱 다양한 디자인 프로세스와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럼 이렇듯 모두를 위한 디자인, 혹은 공공 기관에서의 디자인이 왜 꼭 필요한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심지어 영란은행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우리 팀에게 디자인이 필요한 이유를 묻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모두를 위한, 시민을 위한 서비스를 더욱 수준 높게 제공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시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영란은행에서 근무하면서 발견한 더 중요한 이유는 돈과 시간 절약이라는 경제적인 이유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한 사용자가 여권 재발급을 위해 정부 24 웹사이트나 외교부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고 가정하자. 재발급 소요 기간을 찾고 싶었지만, 웹 사이트가 제대로 디자인되어있지 않아 돌고 돌아 고객 센터로 전화를 걸어서 소요 시간을 찾아냈다. 이는 딱히 문제가 없는 일반적인 시나리오 같지만, 만약 웹 사이트가 처음부터 사용성이 편리하게 디자인 됐더라면 사용자는 고객 센터까지 전화할 필요가 없었고, 고객 센터 직원은 더 복잡한 다른 질문에 응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재발급 기간을 묻는 사용자가 하루에 약 10명이고, 고객 센터에 전화 거는 기간이 약 1분이라 하면 고객 센터 직원 한 명 당 하루에 약 10분을 절약할 수 있다. 이를 한 달, 일 년 등 더 길게 보면 엄청난 경제적인 손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렇듯 생각보다 사용성은 경제적인 면에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넓은 관점에서 볼 때, 공공 디자인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사회 전체의 효율성과 접근성을 향상시키는 핵심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영란은행이나 다른 정부 기관의 UX 디자이너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양한 사용자들의 경험을 세심하게 고려하며,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공공 기관에서 디자인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이해됐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