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그 후의 트라우마

타깃이 되지 않는 나만의 대처 방법

by 이열매

심장은 빨라지기 시작했고 발소리는 바로 내 뒤에서 들려왔다. 그래도 아래층에 사는 남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소리 지르거나 뛰지 말자고 생각했다.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선 순간 내 그림자 뒤로 그 남자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나는 뒤에 있는 남자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흉기를 들고 있는 걸까..? 머리를 내려치면 어쩌지..?' 하는 등 그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려는 찰나 내 앞으로 낯선 남자의 손이 쑥 들어왔고 나의 그림자와 그 남자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때 그 손이 나를 안던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안는 느낌이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 운동신경도 꽤 있는 편에 또래 여자아이들에 비해 힘이 세다고 생각했던 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욕하며 그곳을 걷어차버리리라 생각해오곤 했는데, 인생은 실전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물이 나며 살려달라는 울부짖음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바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다행히 소리치자마자 2층이었던 우리 집 불이 켜지면서 엄마가 "어 OO아!"라며 크게 소리쳐주었고, 바로 아빠가 뛰쳐나왔다.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남자는 도망갔고, 나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빠가 무슨 일이냐며 넋이 나가 울며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고, 엄마도 뒤따라 나오셔서 나를 안아주었다. 아빠는 우는 날 데리고 그놈을 잡겠다며 동네를 돌아다니셨고, 나는 힘들다고 쉬고 싶다며 아빠에게 집에 돌아가자고 했다.



다음날 바로 아빠는 파출소로 가 신고를 했고, 경찰들은 "그거 못 잡아요."라는 말 뿐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 지역에 CCTV를 설치하고 가로등 불을 항상 켜놓은 채로 유지하며 순찰을 강화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도 순찰 나온 경찰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 일을 겪은 뒤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환한 대낮에도 집 앞에 남자만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차가 많이 다니는 큰 도로가에 가만히 서있었고, 집 화장실에서 샤워한 뒤 화장실 문을 열면 문 앞에 누가 서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항상 "엄마!"하고 부른 뒤 엄마가 대답하면 나갈 수 있었다. 엄마가 하는 대답도 녹음된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항상 다르게 대답해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집 앞에 남자가 여러 명 있는 날에는 나에게 말을 걸지도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도 무서워서 울며 부모님께 와달라고 전화를 하곤 했다. 이 끔찍한 트라우마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나에게는 타깃이 되지 않는 나만의 방법이 생겼다.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는 곳을 혼자 걸어갈 때는 이어폰 꽂고 걷지 않기, 힘들거나 술에 취해있어도 당장이라도 빠르게 뛰어갈 것처럼 당당하고 힘 있게 걷기, 주변을 자주 둘러보며 내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는 사람이 보이면 큰 도로가에 서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다리기 등이다.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어도, 내가 술에 취해있어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셔츠 풀어헤친 남자를 보고 겁탈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 우리들의 남자 친구 등이 다른 여자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이 범죄자인데 내가 타깃이 된 것뿐이다.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나에게 해가 될까 숨기지 말고 일단 주변에 알리는 것이 좋다. 가족이나 누구보다 나를 위해주는 친구나 남자친구 등에게 알려 나를 보호해주기를 요청해야 한다. 경찰서나 공공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범인을 잡기에는 증거가 부족하거나 찾을 방법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앞으로의 나를 지키는데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안심귀가 서비스를 이용한다던지 혼자 길을 걸을 때는 112 긴급신고 앱을 켜놓고 항상 신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이 외에도 호루라기나 호신용 스프레이를 들고 다니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생을 안아 줄 당신이기에 오늘의 아픔을 영원히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씻겨져 나가듯 아픔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한 자신의 딸에게 엄마가"여자애가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라며 2차 가해를 저지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겠지만,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끔찍한 상처를 주는 어른들이 꽤 있다.


2차 가해를 입히는 어른들로부터 상처 받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모두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학생은 학창 시절에 친한 오빠에게 성폭행당한 것을 친구에게 문자로 상담했는데,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이 모두 있는 상황에서 큰소리로 문자를 읽었다고 한다. 그 아이에게는 무엇이 더 상처였을까.


상처와 그 트라우마가 영원할 것 같겠지만, 너무나 예쁜 당신이기에 평생을 사랑으로 안아 줄 사람을 만나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나쁜 어른을 만나 힘들었겠다며 당신을 안아 줄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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