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공감
"그거 나도 다 겪어본 거야"
내 친구 중에 상담사 자격증이 있는 친구가 있었다. 한때 자주 만나던 우리는 퇴근하고 카페에서 서로의 비밀을 터놓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힘든 일이 연이어 터지는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살아있는 시체처럼 그저 살아있으니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나의 6년 동안의 짝사랑도 끝이 났다. 짝사랑하던 상대방이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평소 좋아하는 연예인도 우상도 없는 나였는데, 참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하게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첫눈에 반했던 만큼 6년 내내 날 설레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저 친한 오빠 동생으로 간간히 안부 묻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결혼 소식을 축하해주며 장난을 쳤다. "내가 정말 좋아했었는데, 이렇게 가는구나!"내 말을 듣고 그는 장난치지 말라며 웃었다. 내가 좋아했던걸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런 장난을 왜 치냐며 6년 동안 정말 많이 좋아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정말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그저 6년 전에 '쟤가 나한테 호감 있나 보다..'정도로 나를 생각했었고 잠깐 스쳐가는 가벼운 감정인 줄 알았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에게 고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큰 감정을 가지고선 말도 못 하고 그냥 연예인 좋아하듯 혼자 속으로 앓곤 했었다. 지나가다 마주치기만 해도 부끄러워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잘 쳐다보지도 못하던 나였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걸 그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는 "티가 나긴 무슨 티가 나냐"라며 나를 항상 무표정에 웃지도 않고 말도 잘 안 하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도 나를 가리키며 "쟤는 왜 맨날 널 똥 씹은 표정으로 쳐다봐?"라고 그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내가 부끄럽고 수줍어서 한 행동이 남들이 보기에는 무관심으로 보였나 보다. 억울했다.
우리는 그날 서로 다르게 생각했던 부분이 재밌기도 했고, 이런 대화는 이제 마지막이 되겠거니 싶어 대화를 꽤 길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꽤 진지해져서 서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편지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많이 좋아했었다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항상 응원하겠다고 잘 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는 한동안 답장하지 못하다가 왜 이제야 이런 말을 하냐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나의 메시지를 읽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때 주고받은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첫눈에 반한 그때를 제외하고는 짝사랑하는 6년 동안 그는 거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저 연예인 좋아하듯 욕심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도 그저 그를 마음 한편에 담아둔 채 다른 사랑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야 진심을 알게 된 안타까움이 그의 주 감정이었을 것이다. ─영화 러브레터를 본 사람이라면 대충 무슨 감정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와 나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대화를 주고받고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그의 메시지를 지우지 못하고 몇 번이고 곱씹으며 한참을 힘들어했다. 이제야 말할 수 있었는데 아무 말도 하면 안 되는 상황이 슬펐다. 한참 힘든 시기에 짝사랑마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생각하니 내가 살아있는 감정을 느낄만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다시 6년 전으로 돌아가서 사랑을 고백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으리란 것도 알면서 진작 말하지 못한 게 그렇게 서러웠다.
나는 끙끙 앓다가 그 상담사 친구를 만나 며칠 동안 참 힘들었다며 그와의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이 딱 나와 똑같은 상황이 있었다며, 그가 나를 가지고 논 것이란 식으로 이야기했다. 자신도 그런 일 다 겪어봤다며 자신을 1년 동안 좋다고 쫓아다니던 사람의 마음을 다 알면서 모른척하고 필요할 땐 이용하기도 하며 나중에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구가 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는 굳이 시간 내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성 들여 답장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친구를 좋아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내가 좋아했던 그도 내 친구가 아니다.
비슷한 상황이었을진 몰라도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모두 다른 사람이고 그 속에서 오가는 감정과 상대방에게 느껴지는 마음의 크기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와 나의 일을 미화시키고 싶은 것도, 절절한 사랑이었던 것처럼 꾸미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에게 나는 그저 아끼는 동생 정도였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후회된다는 것은 나와 사랑했어야 했다는 그런 소설 같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마음을 이제야 알았고, 몰라줘서 미안하다는 그런 인간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를 참 사랑했었지만, 이제 와서 그와 만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별 후 느껴지는 슬픔과 허무함 같은 감정과 비슷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걸 알지만 나는 이용당한 바보 같은 사람이고, 그는 사람 가지고 노는 나쁜 사람이 되었다는 게 속상했다. 그 상황을 누군가 이해하리란 생각도 안 했고 이해할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친구에게 혹은 상담사에게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최악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며 상대방을 멋대로 판단하는 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낫다"
자격증 몇 개, 경험 몇 번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며 "내가 딱 너 같았어." , "딱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라는 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에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나와 같은 상황인 것 같아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것 같아도 상대방과 나의 깊이가 다르고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경우가 굉장히 많다.
내가 겪었던 비슷한 상황에만 끼워 맞추며,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모든 말들은 상대방에게 상처로 남기도 한다.
내가 힘들었던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딱 너 같았어."가 아니라 "고생했어, 너무 힘들었겠다." 이 한마디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