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장의 기억들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9화>
5일장의 기억들- 이름 없는 사람
다음은 내가 당시 노점상시절을 기록했던 글의 일부이다. 가까이로는 영남의 5일장,
멀리로는 소백산맥의 실핏줄 같은 고갯길과
골짜기를 떠돌던 시절에 쓴 글들이다.
다소 감상적인 부분도 엿보이지만
그 시절 나의 삶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기록이라 그대로 옮긴다.
......(중략)...... 나는 이름 없는 골목에서,
이름 없는 옷을 펼쳐놓고, 이름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투명 비닐포장 안의 셔츠를 매만질 때마다,
그 얇은 천의 감촉이 잠시나마 내 삶의 힘줄을 다시 조여주는 듯했다.그러나 손님들은 흥정의 중간에서 지갑을 닫았다.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고 기억해 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부르는 이도 없고, 기억하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밤이 오면, 그 무명의 시간들 속에서 고독과 외로움은 덜어낼 수 없는 더 큰 무게로 나에게 다가왔다.
정박할 곳을 잃은 배처럼, 나는 늘 떠돌았다.
뭍에 닿았다고 믿는 순간에도, 물살은 등을 떠밀었다.
나는 다시 깊은 곳으로 밀려나곤 했다.
봄.
봄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비가 계속 이어졌다.
방수포 귀퉁이는 늘 찢겨 있었고, 그 틈으로 스며든 물이 옷자락에 붙엊있는 불량 라벨의 글자를 서서히 번지게 했다.
한때 또렷하던 인쇄 자국은 어느새 희미해졌고,
내 이름도, 직함도 그렇게 지워지고 있었다.
은행 창구에서 불리던 이름, 신문사에서 붙던 호칭은 사라졌다.
‘청바지 아저씨’, ‘원피스 총각’ 같은 보통명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고, 나도 그 이름에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예전의 이름은 모래 위에 써놓은 글자처럼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여름.
땅바닥에서는 뜨거운 지열이 올라왔고,시장바닥에서 한 푼이라도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는 생존에 대한 애착은 이글거리는 태양만큼 뜨거웠다.
바람 한 점 없는 차양 아래서 공기는 움직이지 않았고 ,땀에 젖은 셔츠는 살갗에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얼굴엔 먼지가 엉기고, 입안에서는 마른 소금 맛이 났다.
밀려가며 떠밀려 오는 사람들. 흥정의 말은 그보다 더 많았다.그 소란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목소리를 높여도 아무도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손님들이 마구 저어놓고 떠난 상품들을 정리하는
손끝은 피로의 무게가 더해졌고 마음은 점점 메말라갔다.하루가 기울 무렵, 천막을 접으며 셈을 했다. 손바닥엔 땀에 젖은 몇 장의 지폐가 붙어 있었다.
그것이 그런 날의 전부였다.
가을.
계절은 언제나 장사보다 먼저 변했다.
가을이 깊어지면, 장터 마당의 한 줌 햇빛은 더없이 낮게 깔렸다.햇빛이 낮은 만큼 그림자는 그만큼 더 길게 늘어졌다. 바람은 손님대신 낙엽을 몰아 내 발밑에 쌓아 놓았으며, 곡식을 이고 장에 온 시골 아낙의 자루는 절반쯤 비어 있었다
과일 상자에는 팔리지 않아 물러 터진 감들이
고만고만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수확의 계절이라지만 내게는 풍요보다는 쇠락에 가까웠다.
발걸음은 성기어졌고, 손님을 부르던 내 목소리는 끝내 허공에서 갈라져버렸다.
차라리 한낮이 더 나았다. 장이 파하는 저녁이면
이름도 낯선 시골장터 외로운 가로등. 그 가로등 보다 더 외로운 나는 돌아갈 곳조차 없었다.
하루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가을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얼굴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겨울.
겨울은 차갑고 무정했다.
밤사이 내린 첫 눈이 매양 모든 것을 덮어 주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감추어진 것들을 여실히 드러냈다.
눈에 반쯤 파묻힌 빈 상자, 젖은 포대, 누가 버렸을까 저 하얀 눈 위의 깨진 저 사발들은.
이것들은 밤새 내린 흰 눈과 대비되어
묘하게 손상되지 않은 본래의 제 모습으로 투영되었다. 그런 날은 나는 익명 속에 숨지 않고 개구쟁이 소년이나 된 것처럼
장난하듯 옷가지를 흔들어대었다.
사람들은 웃으며 몰려왔다가 저마다의 사연으로 흩어졌다.
그 계절이 지나도록 나는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다음 계절은 물론, 다음 해조차 기약할 수 없는
인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후략)
밀양장에서 시작된 이후 꼬박 1년 동안 시골장을 떠돌았던 나의 일기는 여기서 덮는다.
그 다음 해 겨울, 나에게 닥친 일들에 대해 이제부터 서술하겠다.
1999년 1월
해가 바뀌면서 장사판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IMF로 인한 불황의 그늘이 도시로부터 서서히 농촌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신 부장이 규모가 꽤 큰 도매상을 업고 나를 비롯한 노점상들에게 물건을 대주었지만,매출이 줄어들자 노점상들 대부분이 신용으로 가져간 대금을 갚을 길이 없었다.
도매상 장부 위로만 쌓이는 외상값은 결국 결제되지 못한 채 다시 장사 밑천으로 흘러갔다. 노점상들의 계산은 뻔했다. 몇 푼 되지 않는 벌이는 자릿세와 생활비로 나가고, 남는 건 없었다.
설혹 조금 있다 하더라도 남은 돈으로 외상값을 갚느니, 눈앞의 겨울을 버티는 게 먼저였다. 그러니 도매상 입장에서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었다.
돈도 못 거두고, 물건 팔아줄 사람까지 잃게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도매상들은 밀린 외상 일부를 그냥 탕감해 주는 대신,봄이 올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출고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도매상들이 활동을 중지한 것이었다.
그 소식이 퍼지자 노점상들은 패닉에 빠졌다. 장사판이 돌아가려면 물건이 있어야 하는데, 공급이 끊겨 버렸으니 손발이 묶이는 꼴이었다.
몇몇은 밀린 외상의 일부라도 갚겠다며 물건을 먼저 달라고 매달렸지만, 도매상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나 역시 신부장으로부터 “봄까지 휴업한다.”는 전화를 받았다.그날은 손에 쥔 담배마저 쓰디쓰게 느껴졌다.
밀양장에서 장사를 하던 중이었다.악어 형님에게서 오랫만에 연락이 왔다.
나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지만, 형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무겁게 느껴졌다
“성호아우야, 오래 못 봤다. 시간 되면 얼굴 좀 보자.구 씨랑 대팔이도 오기로 했다. 간만에 니캉 술잔이나 기울이며 얘기 좀 하자.”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형님의 목소리 여운이 계속 신경 쓰여 장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겨울 해가 뭔가에 쫓기는 짐승처럼 빠르게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장터 을씨년스런 바람에 실린 먼지가 내 오래된 겨울 코트 위에 눈처럼 허옇게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오후 장사를 서둘러 접고, 승용차 대신 기차를 탔다. 기차가 한 시간 이상 빠르기 때문이었다.
차창 너머로 스쳐가는 들판은 잿빛으로 굳어 있었고, 내 마음도 까닭 없이 무거워져 갔다.
왕비다방 문을 열자, 평소의 시끌벅적함 대신 적막감이 감돌았다. 경기가 너무 안 좋은 탓이었다. 평소와 달리 손님이 너무 없었다.
영숙 씨는 예전보다 살이 빠져 있었다.그 탓인지 눈매는 더 깊어 보였고, 마른 어깨선은 오히려 도드라졌다.
조명이 비칠 때마다 그녀의 옅은 미소가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 악어형님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맨 안쪽 자리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구 씨 형님과 대팔이도 장사를 빨리 끝냈는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종업원이 커피 대신 맥주 몇 병과 땅콩과 쥐포 등 간단한 마른 인주를 세팅해 주고 돌아갔다. 불경기로 주점에 갈 형편이 되지 않는 상인들의 주머니 사정을 배려하여 밤시간에 한하여 단골들에게 한해 주류도 취급하는 듯했다.
나는 형님께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술잔이 돌기도 전에 악어 형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우야, 사실은 네하고 긴한 상의를 하려고 오늘 불렀다.”
형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 씨 형님이 가방에서 여자 청바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물이 예쁘게 빠진, 아래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며 나팔 끝처럼 살짝 펴지는 최신 유행 스타일이었다.
원단부터 내가 다루는 물건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고급스러웠다. 구 씨 형님이 내 표정을 살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성호야, 이제 도매상에서 청바지 공급이 끊긴다는 건 잘 알제? 그래서 우리가 이걸 마련했다.
겨울에 도바에서 뭐가 팔리겠니? 그렇다고 값 비싼 잠바를 떼와서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기모가 든 따 뜻한 청바지가 제일 만만한 건데, 이걸 끊어버리면 우리 장사꾼들 다 놀아야 한다.
근데 내가 잘아는 성남 의류 공장 전무란 놈이 얼마 전에 연락이 왔더라. 원단값 결제 할 돈이 급하다면서, 여자 청바지 100 박스—한 박스당 40개씩, 도합 사천 장을 공장원가의 반값에 넘기겠다고 구입할 사람을 연결해달라는거야. 원가 절반이라는데, 처음 보내온 샘플이 바로 이거야”
구 씨 형님의 말을 대팔이가 보충했다
“성호야, 생각해 봐라. 지금 노점상들 물건 떨어져 도바 비우고 앉아 있다. 이 정도 물건이면 금방 팔아 치운다. 신용 있는 사람들에게 절반만 뿌려도 본전은 충분히 건지고 남는다.악어 형님이 그래서 선금 삼십 퍼센트 쏴주고 물건을 받았다 아이가”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이 와중에 그래도 돌파구가 있구나 '싶었다.
“잘 되었습니다. 저도 요즘 레다(상품)가 다 떨어져서 고민이었는데, 이 정도 품질이면 아무리 불황이라도 반응은 확실할겁니다. 출고가격이 원가 절반이라면 이건 뭐 완전 대박 일 것 같은데요."
내 말이 끝나자 대팔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가방에서 똑같은 청바지를 하나 더 꺼내더니 내 앞에 내밀었다.
“근데 말이다 니 눈으로 함 봐라. 이걸 어찌 팔겠노”
대판이가 새로 꺼낸 청바지는 아랫단 옆면에 시커먼 얼룩이 묻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짙은 그을음 비슷한 자국이었다.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악어 형님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초지종 설명을 했다.
“ 성남에 물건이 있던 창고 옆 화공약품 공장에서 큰 불이 났단다. 연기가 박스 안으로 들어가 청바지 아랫단에 이렇게 묻어버린 거지.그놈들이 구 씨를 속인 거다.구 씨가 순진해서 당한 건 아니다. 상황이 급하니 뭔가 해보려다 일이 이 지경 된 거지.원망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구 씨 형님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술잔을 잡은 손이 가볍게 떨고 있었다.
악어 형님이 조금 전 보다 더 허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내온 박스 확인해 보니 열에 아홉은 아랫부분에 모두 다 검댕이가 묻었더라. 돈 받은 전무라는 놈은 이미 도망가고 없다. 공장으로 연락을 하니 전화를 받는 놈이 지가 사장이라며 잔금을 마져 부치든가, 아니면 물건을 다시 보내달라고 완전 배 째라식이다.
장당 오천 원씩, 총 이천만 원인데, 그 중 선금 육백만 원이 이미 공중으로 떴다.성호야, 네 생각에는 우리가 저쪽에 맞서 돈을 돌려 받을 방법이 있겠나?”
창밖에 겨울바람이 간헐적으로 유리창을 할퀴고 지나갔다.그때마다 유리창이 부르르르 신음 같은 소리를 내곤 했다.영숙 씨가 빈 잔을 치우려 다가왔다가, 우리들의 무거운 표정들을 읽고 말없이 돌아섰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청바지를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원단 위에 검은 검댕 자국이 선명했다. 그것은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우리 노점상들의 힘든 삶에 드리운 짙은 그을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