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위 다홍색 장미 한 송이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10화>
그을음 묻은 청바지
탁자 위에 놓인 청바지를 모두가 멍하니 보고 있었다.
본다고 굳이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동안 쳐다보다가, 바지 밑단의 그을음을 물티슈로 닦아 보았다. 희미한 얼룩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손끝에 시커먼 가루가 묻어날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은 더 어두워져 갔다.
구 씨 형님이 나를 쳐다보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성호야, 싸게라도 풀면 팔릴 거라 생각했지마는… 본전은 커녕, 팔면 팔수록 남는 게 없겠더라.”
그의 작고 좁은 어깨가 더욱 좁아 보였다.
“고마, 내 물건 같으면 차라리 불에 확 태워버리는 게 속 시원하겠건마는 돈이 걸려있으니.”
대팔이가 악어 형님의 안색을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악어 형님은 말없이 주름진 손으로 청바지의 허리춤만 반복하여 만지고 있었다.
한때 반짝였을 원단의 빛깔이, 작은 얼룩 하나 때문에 제 가치를 잃어버린 꼴이었다. 형님의 눈빛엔 아쉬움과 분노, 그리고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검댕묻은 바지를 들고 한동안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접어 내 가방에 넣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대로는 답이 없습니다. 싸게 풀어도 남는 게 없고, 버리자니 이미 나간 돈이 너무 크잖습니까.”
구 씨 형님이 맥 빠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럼 뭔 수가 있겠노. 니라도 무슨 묘안이 있나?”
검댕묻은 청바지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순 없지만,
이 그을음 묻은 청바지를 살려낼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내일 점심 때 다시 모이지요.
그때 어떤 식으로든 답을 가져오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말이 끝나자 대팔이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는듯 웃으며 처음 내놓은 바지를 들어 보였다.
“야, 성호야. 니 애인 줄려면 그거 말고 그을음 안 묻은 이걸 챙겨 가라, 허허.”
사람들 사이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렀지만,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악어 형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건 농담으로 넘길 일이 아니라는 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정오에 다시 뵐께요.”
왕비다방 건물을 나서는 순간,
영도 다리쪽에서 불어온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바람 속엔 메마른 바다 냄새와 오래된 선박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알수없는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사실 형님이 처한 사정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돕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수단은 밑단을 잘라 여름용 반바지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바지 밑단 재봉비가 많이 들어 이익은 없겠지만 본전쯤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지금 형님 곁의 노점상들이 나처럼 팔 물건조차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는 것,
그들의 하루 벌이가 이 청바지에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왕비다방 ― 푸른 바다 위 장미 한 송이
다음날 정오, 왕비다방의 커튼 사이로 따스한 겨울 햇살이 한 움큼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얼굴들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악어 형님은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고, 구 씨 형님은 밤새 잠을 못 잔 듯 눈 밑이 제법 시퍼랫다.
대팔은 애꿎은 성냥통에다 탁탁 손가락을 튕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자기들이 며칠째 고민해 왔던 사안이라 모두들 거의 체념을 한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제 밤늦게 세탁법도 찾아보고, 부분 염색도 검색해 봤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은 없었어요.그을음이 묻은 청바지는 결국 중고의류밖에 안 됩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 분위기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영숙 씨도 계산대에서 우리 쪽을 힐끔거리며 무슨 말이 오가는지 지켜보고 있는것같았다.
“그런데 어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뾰족한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 어떤 아가씨를 봤습니다. 볼 옆에 장미 문신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죠. 그때, 아이디어 하나가 갑자기 떠 올랐습니다.
처음엔 저걸 청바지에 붙이면 어떨까 했습니다. 하지만 곧 생각했죠. 스티커는 세탁 한 번이면 떨어질 거다. 그래서 제가 더 깊이 고민하다가 방법을 찾아낸 게 바로 이겁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청바지 한 벌을 꺼내어 탁자위에 올러놓았다. 순간, 탁자 주위에서 동시에 신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안도의 숨이었다. 그을음이 있던 자리에 언제 그런 것이 있었냐는듯 선명한 다홍빛 장미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얇은 프린트가 아니라, 바늘땀이 생생하고 촘촘하게 살아 있는 컴퓨터 자수였다.
손끝으로 쓸면 자수실의 결이 느껴졌다. 푸른 청바지 바다 위에서 붉은 장미가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은 얼룩이 아니라, 오히려 눈길을 붙잡는 포인트 장식이었다.
영숙 씨가 멀리서 지켜보다 놀란 눈으로 급히 다가와 바지를 두 손으로 받쳤다.
“어머나, 어쩜 이렇게 예뻐. 손 사장, 나 이거 가지고 싶은데 가져도 돼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며칠 뒤 물건 제대로 나오면 치수에 맞는걸로 열 장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영숙 씨는 곧장 내실로 가서 바지를 갈아입고 나왔다. 허리와 허벅지에 착 달라붙은 고급 청바지.그 아랫단에 다홍색 장미가 또렷하게 빛났다.
그녀가 허리를 돌리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단도 고급이고, 물색도 곱네요. 무엇보다 지금껏 본 적 없는꽃 자수 청바지예요. 이런 건 싸게 내놓으면 오히려 손님들이 의심스럽게 볼 겁니다. 나같으면
이만 오천 원 정도라 해도 기꺼이 사겠어요. 가격이 싸면 역효과예요. 이제 도바에서도 이런 고급 제품을 내놓아야 할 때예요.”
구 씨 형님이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야, 성호야. 니 머리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을음 묻은 걸 이렇게 살려낼 줄이야. 이제야 내 숨통이 트인다.”
대팔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지를 만지작거렸다.“청바지를 이만 원 넘게? 노점에서 통할까 싶긴 한데…. 근데 또 이런 건, 신상 좋아하는 아지매들이 줄 설 수도 있긴하겠네! ”
악어 형님은 담배를 비벼 끄며 천천히 말했다.
“영숙이 말이 옳다. 남들이 흉이라 여기는 걸 장점으로 바꾸는 것,그게 장터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싸게 팔아 본전 건지던 시대는 지났다. 비싸도 제대로 된 물건으로 남겨야 한다.”
탁자를 둘러싸고 다시 활기가 돌았다. 함께앉아 있던 다른 노점상들 사이에서도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졌다.어제까지만 해도 절망으로 눌려 있던 표정이 조금씩 펴지며, 어쩌면 추운 겨울을 버틸수있으리라는 기대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여자용은 장미 자수, 남자용은 독수리나 번개 같은 문양도 괜찮겠네. 공장에 전화해 검댕 묻은 것 혹 남아있으면 마져 보내 달라해야겠네”평소 말수가 적은 구 씨 형님 입이 모처럼 풀렸다.
구 씨 형님과 자수 무늬 이야기를 이어가던 대팔이가
내 쪽을 보더니 말을 돌렸다.
“근데 성호야. 네 잘알아봤나?자수라 하면, 공임이 꽤 비쌀텐데”
“아니야, 대팔아 그 문제 걱정 할 것 없어. 대량주문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아”
나는 대팔이에게 안심하라고 견적이적힌 메모장을 흔들어 보였다
" 성호야, 자수단가와 운임비 등계산해 온 것 같은데 설명함해봐라" 악어형님이 궁금한듯 내얼굴을 쳐다봤다.
“오늘 오전에 바로 이 시제품을 만들려고 서대신동 컴퓨터 자수 공장에 다녀왔습니다.천 장 넘으면 한 장당 삼천 원에 해준답니다. 형님,청바지 원가가 오천 원이니, 가공비 포함 전체원가는 8 천 원 입니다. 요즘 겨울 청바지를 노점상들이 만 오천 원에 팔지 않습니까?자수청바지는 영숙씨 말대로 노점에서 이만 원에 팔면 됩니다. 됩니다. 형님은 장당 만 이천원에 소매로 넘겨 사천원씩 남기고, 소매상은 소매상은 하루 열 장만 팔아도 8만 원 벌이입니다.”
악어 형님이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으며 기분좋게 씨익 웃었다.
“성호야, 사천 원은 무슨. 내가 돈 벌자고 시작한 일 아니다. 이천원만 붙여서 넘기자.”
“형님, 그래도 되겠습니까? 장사는 이익이 남아야 하는데요.”
“사천 장이면 이천 원만 붙여도 팔백만 원이다.
게다가 이건 완판 될 거다.솔직히 이번 일은 네가 다 살렸다, 성호야. 내가 괜히 걱정했네 . 성호 네가 있는데 ”
형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꽉잡으며 말했다.
“자, 인자 됐다. 오늘은 기분촣게 한잔하자.
영숙아, 손님도 없는데 니도 고마 샤타 내리고 같이 나 가자.”
악어 형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오랜만에 다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다시 국제시장으로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뒤 청바지 판매 가격을 두고 다시 한번 열띤 논의가 있었다.
청바지는 결국 2만 원에 팔기로 합의가 되었다. 싸게 내놓으면 ‘짝퉁’이라 의심받고, 비싸야 비싼 대로 고급 이미지가 선다는 게 영숙 씨의 판단을 모두가 받아들였다.
예상대로 날개 돋친 듯 팔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바 앞을 서성이던 손님들은 호기심에 바지를 집어 들었고,원단과 자수를 몇 번 만져보고 보는 사이 자연스레 값어치를 인정했다.
“이거, 비싸긴 한데… 장미꽃이 자수 놓아진 청바지는 처음보네. 한 번 사 입어봐야겠다.”
“원단이 노점물건들과 확실히 다르네.두 벌만 주이소.”
그런 식으로 도바마다 조금씩 차이가 났지만 하루에 작게는 열 벌에서 많게는 열 대여섯 벌쯤 나갔다.
장당 만원이 남았으니, 그 정도면 노점상들이 자릿세를 내고도 충분히 생활은 이어갈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장터에서 나 역시 자수 청바지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추위는 매서웠지만, 도바 위 장미 문양이 주는 활력 덕분에 마음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2월 하순,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악어 형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성호야, 추운데 고생 많제? 네가 쓰던 자리 근처에 도바 빈 게 하나 나왔다. 아직 날도 추운데 오일장 떠돌 지 말고 다시 부산으로 오너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반가움이 앞섰다. 떠돌이 오일장은 배울 것은 많았지만 늘 불안정했다.
장마다 여관을 전전하며 살얼음판을 걷듯 버텼다. 반면 국제시장은 내 삶의 출발점이자, 사람 냄새가 밴 곳이었다.
잊히지 않는 얼굴
밀양장은 수입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인 부부가 성실하고 인심이 좋아, 나는 그 인연을 놓치기 싫어 계속 장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다른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 한켠에 남은 한 올의 미련이 나를 이 장터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삼랑진에서 밀양으로 넘어오던 날,
우연히 만났던 그 여인.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장날마다 내 시선을 거리로 이끌었다.
나는 행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거창, 청도, 합천으로 함께 돌던 장꾼들과는 막걸리 한 사발로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성호 씨, 다음에 또 봅시다. 부산 가서도 잘해요.”
“정들자 이별이네. 언제든지 다시 오소. 당신 자리는 우리가 책임지고 잡아 줄 테니.”
2월의 어느 끝자락. 나는 자갈치 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날라오는 국제시장의 도바로 다시돌아왔다. 차가운 골목 공기 속에서도, 부산 특유의 활기가 나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