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칼 장수의 비애

노점상들의 포식자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11화>

by 손병호

IMF와 사람들


( 시장 골목에서 채칼을 팔고 있는 성호)


시연판매

"어이, 오늘은 이쪽에 자리 잡지마라 ! 어제도 단속 맞았다!" 하는 악어 형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형님.저는 압류되어봤자. 무우와 배추 쪼가리 몇 개인데 그냥 여기서 오늘 장사 할랍니다"

"허긴,아우는 챙길 것이 없어 단속 나오면 바로 접어버리면되겠네"최근들어 단속이 부쩍늘었다. 겨우 손님들을 모아 장사가 될려고 하면 단속반이 들이닥쳤다.의류뭉치를 몇번이나 압수당했었다.

나는 르망 승용차에서 가정용 채칼 시연 도구들을 꺼냈다. 노점상 생활이 길어지면서, 청바지나 셔츠 같은 의류보다 시연(示演) 판매 단속을 피하기도 용이하고 당장의 현금을 만지는 데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도바 위에는 채칼 시연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시연도구래야 별 것 없었다. 스테인레스 양푼, 큼지막한 무, 당근, 감자, 그리고 플라스틱 채칼 몇 개가 전부였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달러 장수 아주머니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날 보며 투덜거렸다.

"아이고, 성호 총각. 이제 와이셔츠도 모자라 채칼이요? 그러지 말고 달러 좀 사 가이소. 다음 달엔 환율이 더 뛴다 안 합니까!"

"아주머니, 저는 달러 대신 현찰이 필요합니다! 이거 팔아서 당장 이번 달 월세 내야 돼요."

내가 멋쩍게 웃자, 아주머니는 혀를 찼다.

"쯧쯧, 잘 나가던 은행원이 뭐 한다고 이 고생이요. 고마 가만히 있었으면 지금쯤 우리 조카처럼 과장님 차장님 소리 듣고 앉았을 낀데 , 월급은 좀 많았으려고?

"봐라, 봐라, 둘 다 세설 그만 까고, 성호 니는 어여와서 안 처묵나 " 욕쟁이 재첩국 순이 할머니가 뚝배기를 닦다가 소리쳤다. " 단속 뜨면 아침은 고스란히 굶을 끼가!" 할머니는 내게 국밥 한 그릇을 억지로 안겨주며 "배곯으면 도망도 빨리 못 칠 거 아이가!"라고 덧붙였다.

세명약국 노점 골목에 주부들의 발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제 공연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나는 무를 한 손에 잡고 채칼을 높이 들었다. 주변에 슬슬 아주머니 몇이 모여들었다.

"자, 주목! 주목하세요! 오늘은 제가 주부 9단도 울고 갈, 이 시대 최고의 효자손 소개하겠습니다.

익살스러운 말투로 시연을 시작했다. "오늘, 이 채칼 하나면요, 무채 썰다 너무 열받아 괜허 남편 등짝 때릴 일 없습니다! 이 채칼은요, 아지매들 남편보다 더 쓸모가 많습니다! 왜냐? 남편은 돈만 벌어오지만, 이 채칼은 나의 시간을 벌어줍니다!"

가볍게 무에 채칼을 대자, 놀랍도록 얇고 균일한 채가 순식간에 양푼에 쌓였다.

"보세요! 톡! 톡! 톡! 이걸로 겉절이 만드시면, 옆집 순이 아줌마가 분명 물어봅니다! '아따, 순자 씨! 그것 어디서 맞추었소?"

모여든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총각 말도 참 잘하네! 그런데 그거 금방 날 나가는 거 아니죠?"

한 아주머니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나는 무를 내려놓고, 이번엔 당근을 들었다.

"날이요? 자, 보세요! 이 돌덩이 같이 딱딱한 당근을! 제가 아무리 힘을 주어 긁어도, 날은 절대 상처 하나 안 납니다! 이 채칼, 10년 보장입니다! 10년 안에 날 나가면, 제가 이 자리에서 국밥 할머니 국밥을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 저기 미칫나? 내 국밥을 니가 왜 공짜로 주노!" 국밥 할머니가 버럭 소리쳤고, 시장 사람들은 다시 한번 와하하 웃었다.

나는 이내 감자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감자입니다! 감자채! 얇게 썰고난 뒤 후라이팬을 달구어 식용유를 몇방울 넣어 볶으면 애들이 환장합니다!

이걸로 채 썰어서 감자전 부치면요, 남편이 '세상에, 내 아내가 이렇게 멋진 안주 요리를 하다니!' 하며 퇴근하자마자 옆에 와서 들러붙는다말씀입니다요!"

나의 익숙하고 능청스러운 말솜씨에 결국 아주머니 몇 명이 지갑을 열었다.

"하나 주세요. 총각 말이 하도 재미있어서 산다, 재미 값이다!" "나도 하나! 우리 시어머니도 하나 갖다 드릴라요!"

잠깐의 시연으로 순식간에 현금이 쌓였다. 현찰을 만질 때 느껴지는 기묘한 생존의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노란트럭의 단속

하지만 장날의 공기는 늘 긴장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대팔이가 손님에게 "이거 새 물건 맞아유! 며칠 전에 들어온 거유!"라며 설익은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억지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떳다! 단속이다! 노란 트럭이 다!" 길목 끝에서 구 씨 형님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노란색 대형 화물트럭. 그 가르랑 가르랑하는 소리가 골목 어귀에 들리자마자, 순식간에 시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아이고, 씨 X! 채칼 겨우 몇 개 팔았는데!"

뒤에서 내 장사를 도와주던 악어 형님이 욕설을 내뱉으며 능숙하게 접이식 행거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성호야! 넌 시연 도구부터 박스에 넣어! 빨리!"

좌판이 들썩이며 무너졌다. 순식간에 김밥 아주머니의 튀김 냄비가 뒤집히며 기름이 흩날렸다.

"내 김밥! 내 튀김! 아이고오, 내 기름!" 아주머니의 비명은 단속반의 호루라기 소리에 묻혀버렸다.

상인들은 허둥지둥 물건을 박스에 밀어 넣었다.

나는 채칼 박스와 무가 담긴 양푼을 양팔에 끌어안고 르망 승용차 트렁크를 향해 냅다 달렸다.

단속반원들의 날카로운 호루라기와 고압적인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봐요! 여기 다 치우라고 했지! 당장 철수 안 해! 물건 다 압수합니다!"

단속차량인 노란색 대형트럭이 마치 거대한 포식자처럼 서서히 골목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구청단속반원들이 좁은 골목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트럭 범퍼로 허술한 파이프 천막을 찢고, 대팔이의 도바 위에 널부러진 '장미 자수 청바지' 샘플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다.


"와이라노?이거 새 물건이라고! 잡지 마이소!" 대팔이가 물건을 잡고 단속반즐과 씨름하다가 결국 옷가지들을 압수당했다.

구 씨 형님은 발빠르게 나머지 물건을 챙겨 달아났고, 악어 형님은 채칼 상품을 박스 안에 챙겨 넣다가 단속반장에게 쫓겨 골목 안으로 냅다 뛰었다.

그렇게 단속반이 한바탕 휩쓸고 난뒤 , 남는 것은 먼지 속에 나뒹구는 채칼과 무채, 그리고 땀과 실의에 젖은 젊은 몸뚱아리 뿐이었다.


르망 승용차는 늘 좁은 골목이나 길가에 서 있었고, 날마다 노란색 단속 스티커가 유리창에 덕지덕지 붙었다.점심 무렵, 왕비다방 배영숙이 커피를 갖다 주며 내 르망 승용차 전면유리창을 가리켰다.

"한사장님, 저 스티커 좀 떼세요. 차가 불쌍해?"

"영숙 씨, 떼 봤자 또 붙는데 뭐. 이 노란색 스티커가 세상이 나한테 찍은 '불법' 낙인인데. 인제는 떼는 것도 귀찮아요."

"아이고, 참… 옛날에 잘 나가던 신문사 기자 맞어요?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영락없는 채칼 파는 장꾼인데."

"기자는 무슨 기자. 지금은 그냥 잘나가는 채칼 장수 지.

영숙 씨, 커피 말고 시원한 보리차 한 잔만 갖다 주소. 내가 채칼 몇 개 파느라고 오늘은 목이 다 탔다."

나는 어지러이 놓여있는 채칼 박스를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IMF의 그늘

국제시장으로 돌아온 지 일 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힘든 시절이 많았지만 동료 노점상들과의 관계는 나를 버티게 했다.

내가노점상을 시작한이후 IMF 여파로 별안간 많은 사람들이 번듯한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렸다.

대기업과 은행들이 도산하고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도시빈민문제가 심각한 화두로 언론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생의 끝자락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아무라도 어느날 갑자기 생활터전을 잃고 거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매스컴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계약직이라는 낯선 단어가 주위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노점 시장에도 IMF 못지않은 혹독한 겨울이 닥쳤다. 영하 10도 이하의 한파가 매일 같이 이어졌다.

수은주는 한낮이 되어도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오늘같이 이래 추우면 누가 이 시장 바닥에 나오겠노! 성호 씨. 이러다가 동사하겠다. 우리 왕비다방에 잠시 피신 갔다가 오자 " 달러 장수 아주머니는 손난로를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랬다. 바깥에 하루 종일 계속 서 있으면 몸의 체열이 외부로 다 나가버린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어도 서너시간 지나면 나중엔 얼어붙은 동태가 되어 머릿속도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살려면 다방으로 가서 잠시라도 몸뚱이에 온기를 쐬어주어야 했다.

결국 그 겨울은 장사다운 장사 한 번 못 하고 지나가 버렸다. 노점상들은 하나 둘 장사를 접고 공장으로, 더러는 공사판으로.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나 역시 밑천은 이미 바닥이 났다.

어느 날 저녁, 국제시장 왕비다방에서 구 씨 형님을 만났다.

그는 밤늦게까지 정리하던 워커 부츠 샘플 몇 개를 가방에 넣고 있었다.

"형님, 저. 르망을 팔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구 씨 형님은 샘플을 넣던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 보았다. 요즘 들어 그의 작고 좁은 어깨가 더 처져 보이는 듯했다.

"성호야, 결국 그 차를 팔아야 되는구나. 네 분신 같은 차인데. 그걸로 오일장도 오래 다녔고..."

형님은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불은 붙이지 않고 안타까운 눈 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죠, 일단 겨울을 버티고 봄을 보려면…"

구 씨 형님은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젖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 하는 수 없지.혹시 중고차 쪽으로 잘 아는 사람이라도 알아봐 줄까?"

"아닙니다, 형님. 이미 아는 사람에게 연락해 뒀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날 밤, 나는 장사초기 신부장으로 부터 빌려준 돈 대신 받았던 애마 르망 승용차를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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