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적인 입맞춤, 그 맛은

정체불명의 사내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12화>

by 손병호

낯선 여인과의 동업


“성호야, 니 르망 차 팔았다며?”

“예, 그렇습니다.”

“장사꾼이 차도 없이 앞으로 으짤라꼬? 남의 도바서 일당쟁이 라도 뛸 기가?”

“돈을 빌려서라도 차를 구해 봐야죠.”

“야가, 지금 무슨 소리하노? 우리 같은 노점상이 돈 빌릴 데 있으면 뭐 하러 노점상 하겠노. 그러지 말고 니 내 얘기 함 들어봐라.”

악어 형님은 며칠 전 형님 도바에 찾아온 한 아주머니 얘기를 꺼냈다. 겉보기에 인물도 좋고, 옷차림도 깨끗한 젊은 여인이 장사를 배우러 형님을 찿아왔었다고 했다. 장사할 상품들을 싣고 다닐 차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제가 지금 차는 없지만 새 차를 바로 뽑겠다"며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보름쯤 우리 도바서 연습시켜 자리가 나는대로 내보내려고 했었지. 근데 , 아주머니가 적극적이기는 한데, 혼자 길거리에서 장사할 만한 강단은 약해 보이더라.무엇보다 오랫동안 장롱면허이다보니 당장 물건을 넣고 뺄수가 없는기라.

마침 대팔이 말로는 니가 차를 없앴다카데. 그래서 아주머니한테 처음엔 여자 혼자 하기 힘드니, 일단 우리 동생하고 당분간 동업해 보라 했더니, 시키는 대로 하겠다카더라.마침 대연동 못골시장에 도바가 하나 나왔으니 내일부터라도 같이 함 해봐라 “


코스라고 불리우는 여인들

사실 자동차를 팔고 나니 장사를 할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극심한 불황으로 겨울 내내 다른 도바들도 어차피 개점휴업상태였으니 굳이 장사를 할 의욕을 못 느꼈었다. 다만 5일에 한 번씩, 기차를 이용하여 밀양장에서 장사를 하며 봄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봄이와도 차량이 없어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는 힘들었다. 어쨌든 차량을 제공할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또 동업을 한다고 해도 크게 손해를 볼 이유가 없었다. 손님이 뜸할 때는 동업자가 손님으로 가장 하여 물건을 고르는 척하며 고객을 유인할 수 있으니 매출에 상당히 도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인하는 역할을 맡는 시람을 '코스'라는 노점상 은어로 불렀다 .코스는 대체로 마흔 중 후반 나이로 적지 않은 일당을 주어야했다.

노련한 코스는 막상 유인했던 살(손님-노점상은어)이 곁에서 구경만 하고 사지 않을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다음 단계로 콧구멍 쑤시로 들어간다.

"사장님 요것 하고요. 그래 저것도 같이 싸 주세요. 입어보고 사이즈 안 맞으면 반품 확실히 되는 거죠' 하며 지갑에서 돈을 처억 꺼내 시원하게 거래하는 액션을 취한다. 그리고 난 후, 보란 듯이 옆에 있던 살 에게 '요까짓 노점물건 사는데 돈을 벌벌 떨 정도냐?는 약간 무시하는 듯한 눈길을 주고 휑하니 떠나 가버린다. 그러면 구입을 망설이거나 살 의욕이 없었던 살들 조차 자존심을 구기지 않으려 지갑을 열게 마련이었다.

이렇게 상대의 자존심을 이용하는 상술을 우리는 '콧구멍 쑤시기'라고 했다. 사실, 코스는 장사하는 사람보다 더 힘들다. 자신의 연기력이 바로 매출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간혹 한창 장사를 하는 중, 손님과 코스가 다시 조우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아무리 장사 수단이라도 그런 경우에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동업자이자 코스 아주머니, 말숙 씨와의 인연이 시작됐다.그녀는 마흔두 살, 나보다 두어살 위였다. 약간 촌스러운 이름과 달리 얼굴은 귀티가 넘쳤다.

오뚝한 코, 서글서글한 눈매, 당시인기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닮은 얼굴이었다.

왕비다방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찻잔을 들고도 한 모금 넘기지 못했다.

이 여자가 과연 노점 장사를 버틸 수 있을까.

다방 안은 담배 연기와 잡담으로 어수선했지만, 그녀만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가늘고 흰 손가락의 끝이 잘 정리 되어있었다. 고생이라고는 해보지않은 손가락이었다.당당하게 나를 쳐다보는 자세는 싱대를 압도하는 기품있는 귀부인 자태였다.

시장 바닥은 말보다 먼저 몸이 나가는 곳이다. 비 오면 천막을 붙잡아야 하고, 단속 나오면 재빨리 걷어야 한다. 손님이 옷을 툭 던져도 다시 개켜 올려야 하고, 흥정 끝에 돌아서는 뒷모습도 붙잡아야 한다.

그 모든 일을 저 손으로 할 수 있을까.

나는 괜히 계산대 쪽을 바라보며 시간을 끌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차를 젓고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연약해 보이기보다 단단해 보였다.

그래도 나는 잠깐 멍해졌다.

저 얼굴이 시장 바람을 견딜 수 있을지, 그보다 내가 그 바람 속으로 끌어들여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왕비다방 테이블 너머에서 그녀가 먼저 웃었다. 입가에 장난기부터 올라왔다.

호호 . 왜, 그렇게 빤히 상대를 쳐다 봅네까?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보여요?그쪽도 교사나 공무원 같은 얼굴상인데, 노점상 하잖아요.”

말끝이 묘했다. 익숙하지않은 함경도 억양이 잠시 내귀를 스치고 지나갔다.세련된 얼굴이었다. 화장은 진하지 않았지만 선이 또렷했다. 그런데 목소리는 보기와는달리 낮고 굵었다. 웃을 때도 숨기지 않았다. 다방 안이 잠깐 조용해질 만큼 또박또박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을 고쳤다.

노점이 그녀를 견디게 할지 걱정할 게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가 그녀를 견뎌야 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중학생 아들과 시부모를 부양하며 살아가는 생활력 강한 여인이었다.

노점 옷장사를 배워, 그녀 집 1층,빈 가게에 작은 옷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했다.

우리들의 처음 장사는 여자 반팔 니트 였다

겨우내 비었던 자리들이 봄이 되면서 속속 임자가 나타나 먼저 차지했기 때문에, 말숙 아주머니와 내가 장사할 빈 자리는 없었다. 악어형님이 소개한 못골 시장과 창원 상남시장.진해 경화시장등을 번갈아 다니며 장사를 해야했다.

말숙 아주머니와 함께 하는 장사는 그 이전과 와전히 달랐다.

그녀가 코스를 보며 도바 앞에서 물건을 고르는 척, 서 있기만 해도 시장 아주머니들이 몰려들었다.

장사 시작한지 며칠되지 않아

"사장님, 아직도 아침저녁엔 쌀쌀하니 반팔 니트 위에 걸칠 수있는 카디건도 세트로 함께 팔아 봐요" 하며 장사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었다.

“사장님 , 오늘도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팔았네요. 하지만 여태까지 장사한 곳들은 너무 많이 빼먹었잖아요. 이제 살들도 예전같지않고요. 여기 도바도 이제 끝물인 것 같아요.딴데로 옮기면 어떨까요?"

그녀는 노점상 은어가 재미있는 지 사람이라는 단어를 굳이 우리들의 은어인, 살이라고 표현했다.

"말숙 씨가 코스니, 살이니 하며 사용하는 말은 어쩐지 어색하게 들려요..그리고 요즘은 성수기라 다른 시장에 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걸요

그냥 여기서 조금 더 버텨봐요."

"아이고, 우리 친구들은 내 말투를 듣고 전문가 같으니 재미있다고 하던데.. 호호 자리는 걱정 말아요. 수영팔도시장으로 가기만 하면 돼요.'

“ 팔도시장은 살들이 많이 꼬이는 큰 시장이지만 자리 없으면 아무나 못 들어가요.”

“그건 걱정 말아요. 사장님은 이 사람 말숙이만 믿어 봐라니까.”

그녀의 근거 없는 확신에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도매상으로부터 평소보다 물건을 조금 더 많이 받았다.

최칠근과의 조우


팔도시장에 도착하니 말숙 씨가 먼저 와 있었다. 그녀 옆에는 덩치 큰 내 나이 정도의 사내가 있었다.말숙씨의 남자친구라 했다. 명함에는 ‘새 부산 건설 대표이사 최칠근’. 부동산 기획업자이며, 팔도시장번영회장과 친하다고 했다

최칠근은 말숙 씨의 부탁을 받아 보름정도를 기한으로 시장 중심가에 우리가 장사할 자리를 이미 확보해놓고 있었다.

그가 잡아준 자리 덕분에 장사는 대박이었다. 물건은 저녁이 되기도 전에 이미 다 팔려나갔다. 대충 정리를 하려는데, 썬글래스를 낀 서른 중반의 멋쟁이 젊은 여자가 우리 도바 쪽으로 걸어왔다.

“아유,언니는! 여기 있었구나. 난 또 이렇게 앞에 있는 것도 모르고 몇바퀴나 빙빙 돌았어 ”썬그래스여자가 말숙씨에게 친근하게 말쌨다.


“가시나야, 그러길래 내가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라 했잖아. 팔도시장이 너희동네 못골 시장만큼 조그마한 줄 알았나?”

언니는 이게뭐야 ! 내딴에는 도와주러 왔는데 이렇게 벌써 클로즈하면 어째요..큰일이네.오늘 내 페이는 어디서 받아? 난 완전 헛물켰네.”

“미영아, 어쨌든 니 잘 왔다. 우리 오늘 장사가 잘되어 일찍 마쳤으니 용호동 가서 바다도 보고 밥이나 먹자. 최 사장이 밥 산단다. ”

그녀 이름은 심미영. 말숙 씨의 절친 동생으로 나와 동갑내기였다

신랑은 남포동과 서면에 핸드폰 가게를 수십 개 나 운영하는 재력가였다, 그러나 남자가 돈과 여자만 밝히고 집에는 무심해 별거 중이었다.

말숙 씨와는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 지금까지 이어 온 사이였다. 둘은 가까우면서도 서로 묘한 경쟁심이 있어 보였다.

심 여사 또한 미인축에 들 만한 인물이었지만, 말숙 씨가 가진 귀티는 보이지않았다.

그녀의 금속성 고음의 서울말이 귀에 약간 거슬렸다.

피아노 전공이었지만 본인이 대졸이라는 것을 과시라도 하려는 양, 미영이라는 여자는 대화 중 곧잘 영어를 섞어 쓰곤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말숙 씨를 돕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번질나게 우리 도바를 찾아왔었다.

장사가 안 되는 날엔 일부러 살 필요도 없는 물건들

사주기도하며 뒷정리도 거들고, 심지어 내 반찬까지 챙겨 오곤 했다.

도바를 거의 다 걷었을 무렵에 최 사장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빈 도바를 보며 농담반 감탄반조로 웃으며 말했다.

“ 어이쿠,벌써 몽땅 다 팔았네. 오늘 장사가 완전 대박이구먼! 이 정도면 저녁은 내가 살게 아니라 진우엄마와 한 사장이 사야 되는 거 아냐? ”

나는 그때, 말숙 씨 아들 이름이 진우라는 것을 알았다.

왜 이래요?부티나는 벤츠 사장님이 노점상 등에 빨대 꽂을 일 있나? 본인이 내게 한 사장 소개해주면 한턱 낸다 해놓고, 이제 와 딴소리네.”

우리는 최사장의 밴츠를 타고 식당이 있다는 용호동 해안가로 향했다. 가는 도중, 미영씨는 경성대 근처에서 다른 볼 일이 있다며 내렸다.

용호동입구에서부터 차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차창 밖 희뿌연 가로등 불빛이 스쳐가는 도로변사이로 어둠이 어느새 짙게 깔려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창밖 풍경보다 옆에 앉은 사내에게 시선이 꽂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최칠근.말숙 씨의 다정한 전화 통화를 통해 이미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첫만남에서 이렇게 ㅊ자동차안 밀폐된 공간에서 그와 함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키는 1미터 80을 훌쩍 넘었고, 군더더기 없이 운동으로 단련뎐 몸집이 운전석 시트를 가득 채우고있었다

폭력조직의 우두머리 같은 강한 위압감을 뿜는 덩치였다. 있었다. 차 안은 엔진음보다 그의 존재로 더 크게 진동하고 있는 것같았다.

앞만 보며 계속 운전에만 집중하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사장, 사실 오늘이 내 귀 빠진 날이오. 거래처 사장이 축하해 준다고 오라 하니 무시할 수 없어 가는 중이오. 혹 사전에 말씀 안 드려 불편했다면 양해해 주시오. 게다가 요즘 말숙 씨가 나를 만날 때마다 한사장 얘기를 얼마나 많이하는지, 내가 궁금하기도 하여 기회 되면 만나서 친해지고 싶었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초면의 사람을, 그것도 생일 자리라는데 사전 예고 없이 끌고 오다니.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상한 긴장과 한인간에 대한 궁금증이 발동되고 있었다.

"생일 자리라니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식사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두 분이서 시간 보내시죠. 저는 여기서 내렸으면합니다."

그는 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 오히려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허허, 한 사장, 나이도 나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난다면서요?그냥 우리 오늘부터 친구 합시다. 말숙 씨랑 동업자 사이이고, 앞으로 나와는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닌데 차라리 서로 말 놓고 편하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소.”

말숙 씨도 내리겠다는 나를 급히 만류했다.

“아유, 한 사장님, 어차피 저녁은 드셔야죠.여기 내려봐야 돌아갈 택시도 버스도 없어요.”

나는 그녀와 설왕설래하기 싫어 중도에 내리는것을 포기했다.

“그럽시다, 최 사장말대로 지금부터 우리 친구로 지냅시다.”

내 딴에는 목에 힘을 주고 가래침을 삼키는 기분으로 말했지만, 되려 그의 낙낙한 웃음이 차 안을 울렸다.

차가 용호동고개를 넘어 바닷가에 다다르자, 밤바다는 깊고 검은몸을 뒤척거리고있었다. 파도가 낮게 포말을 일렁이며 바위에 부딪혔고, 눈앞에 오륙도 바위섬이 시커먼 유령처럼 안갯속에 떠 있었다.

신축 건물인듯한 2층 건물이 어둠 속에서 희끗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먹물처럼 짙은 바다를 배경으로 이층 건물은 무슨 사연을 가진 짐승이 홀로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칠근이의 안내를 받아 이층으로 올라가니 창 박으로 바다가 바라 보이는 아늑한 실내 바가 있었다. 마흔 중반의 글래머 여자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칠근은 그 여자 앞에서 지금까지의 행동이나 말씨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오래전부터 맞춰 온 파트너처럼 그와 여사장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자신을 안 대표라고 소개한 여사장은 이곳은 간혹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1층은 횟집으로 개업준비 중이라고 했다.

안대표카는 주인여자가 와인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칠근 씨, 생일을 축하해요. 말숙 씨는 오늘 처음 보지만 칠근 씨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어요. 두 분 모두 처음 보는 자리이지만 편하게 한 잔 하면서 즐기다 가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칠근은 천연덕스럽게 그의 팔을 안여사의 목 위로 두르고, 안여사 또한 칠근을 거의 껴안은 듯한 상태로 농염하게 잔을 비웠다.

순간, 말숙 씨가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눈빛이 날카롭게 이글거리고있었다.

“흥, 그 정도 러브샷에 기죽을 우리가 아니지. 우리도 러브샷 해요, 한 사장님.”

그녀는 내 앞에 놓인 양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내 입술에 ‘쪽’ 하고 기습적인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혓바닥이 내 입안으로 스며들며 삼키지 않은 양주가 뒤섞였다. 황망함과 동시에 달콤한 긴장감이 내 전신을 스쳤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칠근을 바라보니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술을 따르더니 내게 말없이 잔을 건넸다.

나는 술잔을 받으며 오늘의 술자리가 단순하지 않음을 눈치챘다. 단순한 동업자나 연인의 생일자리, 친구의 자리는 분명 아니었다.

확실히 이 괴이한 요령부득의 자리는 의도된 의미가 있는 자리이며 내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데끼지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나는 내 역할을 도무지 알 수없었다. 어쩌면 모르지만 아는 척하는 것이 바로 내 역할 일수도 있을 것이다

긴장과 알 수 없는 설렘이 교차하는 한복판에 나는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복합적 자리에서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깨어 있었다.

바닷바람이 술기운과 뒤섞이며 내 안으로 스며들었고, 오륙도를 때리는 밤의 파도 소리는 내 심장의 고동과 맞닿았다.

순간, 나는 모든 긴장과 설렘, 불안과 욕망이 내 안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말숙, 칠근, 안 여사… 세 사람과 나, 이 네 존재가 만드는 미묘한 힘의 균형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내려놓으며, 동시에 내 안에 오랫동안 묶여있던 감정이 해방되는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