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바위에 뜬 별 2부 제8장 태양장에서
낯선 재회의 그림자
멀리 간선도로에서 분주하게 들려오던 자동차 엔진음들이 어제부터인지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느덧 밤이 꽤 깊어 있었다.
밤 열두 시가 가까운 시간, 오랜 기간 부산의 금융 중심지인 중앙동 뒷골목.
낮의 분주함이 모두 빠져나가, 간혹 지나치는 취객들이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들만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양 이 골목을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맴돌고 있었다.
겨울이 이미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무렵이면 항용 부산 특유의 습기가 살짝 붙어 있어, 차가움 뒤에 희미한 온기가 엉겨 있었다.
영숙 씨는 포장마차에서 일어서는 순간 잠시 휘청거렸지만, 차가운 바람에 정신을 가다듬은 듯 조금 전보다 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젠 술기운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아요. 이 늦은 시간에도 성호 씨가 옆에 있으니 왠지 기분이 좋네요. 내 주위의 복잡한 것들로부터 아주 해방이 된 기분이에요.”
그 말이 바다 위로 흘러가는 불빛과 닮아 있었다.
태양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바람이 방향을 달리했다. 영도에서 넘어온 바람이 골목의 어둠을 살짝 흔들어놓으며 우리 얼굴을 스쳤다.
그 순간, 중동집 아주머니가 태양장으로 옮기라고 했을 때부터 내 안쪽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던 그 요령부득의 떨림이 멈추었다.
단지 멈추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조금씩 어떤 위험한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태양장으로 걸어갈 것이 아니라, 그냥 택시를 태워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어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술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그 생각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도, 나도, 우리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도. 봄이 왔지만 우리는 아직도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었었다.
중동집 포장마차와 가까운 거리에 인접해 있는 태양장은 용두산의 동남쪽 기슭, 부산호텔 바로 맞은편에 지어진 삼층 건물이었다.
우리가 소주병을 들고 “중동댁이 보냈다”라고 하자, 여관 종업원은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삼층 특실로 안내했다.
태양장의 특실은 온돌방으로 된 응접실과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침실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출입문고 방 사이의 중문을 닫자 온돌 바닥에서 기분 좋은 열기가 후끈 발끝을 감쌌다.
응접실 방 한편에 작은 테이블 위에는 물컵 두 개만 놓여 있었다.
영숙 씨가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모텔에 참 오랜만에 와보네. 포장마차에서 떨던 것보단 훨씬 낫네 근데 모텔은 서울이나 부산이든 어디든지 실내는 똑같아, 테이블 하나. 침대. 하나 소형 냉장고, 텔레비전. 아유 시시해”
나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일부러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도… 이렇게 청춘 남녀 둘이 들어오니
괜히 좀 어색하긴 하지요? 그렇잖아요”
영숙 씨가 나를 쳐다보며 호호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유, 성호 씨. 여긴 러브모텔인데 남녀 둘이 오는 게 정상이지. 뭐가 어색해요?
남자끼리 오는 게 더 문제죠.”
너무나 당연한 그 말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싱긋이 웃었다. 침대 위의 이불은 정리된 듯 보였지만
마치 누군가 사용했다 갔던 흔적을 굳이 덮어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영숙 씨가 그쪽을 힐끔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성호 씨는 수상한 인물인 것 같아.”
“아니 왜요?‘ 난 수상한 부분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중동댁 아주머니가 우리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이곳으로 안내하던데? 약간 수상해 호호? 설마 모텔 상습 이용꾼?””
말투는 장난인데, 장난만은 아닌 뉘앙스가 있었다.
나는 괜히 손바닥을 비비며 대답했다.
“뭐… 살다 보면 올 일도 있고…
근데 난 여긴 오늘 처음이에요. 진짜로.”
마치 내가 큰 죄라도 지은 양 과장하여 난처한 얼굴을 하자 영숙 씨가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요. 오늘은 봐줄게? 그냥… 술이 추워서 들어온 거다,
괜히 야릇한 상상은 하지 말고요. 그런 건 이따 취하면 하고.”
그 말이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농담인지 잠시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성호 씨, 나 먼저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얼굴부터 따뜻한 물에 좀 씻고 와야겠다.”
그녀가 비로소 생각난 듯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난 후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함께 온 여자가 욕실로 들어가는 장면은 정말 많이 익숙한 장면이었다. 우린 술이 취하면 여기 태양장으로 왔다. 특실이 비어있을 땐 으레 특실을 사용했다.
“오빠. 아무리 술 힘을 빌리는 거지만 이런 곳, 정말 싫어 오빠는 언제까지 누군가 사용했을 것 같은 이런 이불을 내게 덮도록 할 거야. ”
그녀가 헤어지기 직전에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항상 먼저 욕실로 향했다. 결국 그 말은 내게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을 종용하는 말이었지만 모아놓은 돈도, 결혼하겠다는 의지도 약한 내겐 당장 실현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몇 달 뒤부터 그녀는 바쁘다는 핑계로 정기적인 만남을 피하더니, 어느 날 그녀의 친구라는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친구를 위한다면 이젠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 “
하필, 그녀가 다시 만나는 사람은 나와 막역하게 지내온 내 대학 동기 친구였다. 그녀를 내게 소개해주었던 그 친구였다. 우리 셋 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여태까지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나의 진심을 표현하는 길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섣부른 결정이었다.
태양장
창문 아래로 바다에 뿌리를 둔 부산대교의 교각들이 긴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다리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밤을 지키고 있었던 사물처럼 깊은 침묵으로 버티고 있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수면과 평행을 그리며 달리던 긴 가로등 행렬들이 옛 조선공사를 지나자마자 급한 사선을 그리다 청학동 고개 끄트머리 어디쯤 해양대학 방면으로 사라졌다.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선박의 기관에서 토해낸 푸른 연무가 바다 위를 떠돌고 있었다.
연기는 항구의 불빛을 밀어내며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고,
그 흐름이 마치 항구의 지워진 이력에서 스며 나온 오래된 생각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항구의 불빛들은 바다를 더듬었고,
바다는 그 불빛아래 사로잡힌 짐승처럼 간간히 숨결만 토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멈춰 선 물결과 조용히 흔들리는 계류선 사이로
밤의 냄새가 낮게 깔려 흘러갔다.
항구는 밤을 다 건너지 못한 얼굴로 깨어 있었다.
등대의 불꽃은 먼 곳에서 짧게 깜빡이며 이 바다의 시간을 세고 있었고,
목적지가 베일에 싸인 배들의 항로 등은 검은 물결 위로 닿았다가 곧 사라졌다.
그 사라짐이 더 큰 고요를 데려와
항구의 가장 낮은 곳부터 천천히 적막을 채웠다.
배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갈 곳을 잃은 물건처럼 가만히 서 있는 조선소의 거대한 선박 위로
바람이 그 표면을 스쳐 지나갔으나 어떤 것도 흔들지 못했다.
고요는 물러서지 않고 항구를 서서히 잠식했다.
멈춘 것들과 떠나지 못한 것들이 서로를 낯설게 쳐다보고
그 낯섬의 시간들이 왕왕 이 밤의 밑바닥을 지배하고 있었다.
버려진 부표처럼 점점이 떠 있는 시간들이
항구의 어둠을 오래오래 붙잡고 있었다.
잠시 후, 물소리가 잦아들고 욕실 불빛 아래 그림자가 멈췄다. 손이 유리 위를 스치며 문을 열었다.
영숙 씨는 긴 타월로 비너스같이 쭉 뻗은 나신을 대충 가리고 반라가 되다시피 한 몸으로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예의 풍만한 가슴과 육감적인 허연 허벅지가 거의 노출되다시피 하여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 아무래도 눈이 조금 불편하죠? 짧은 치마가 불편해 나는 그냥 담요 두르고 이렇게 편하게 앉을래.”
“담요보다는 옷장 안에 아마 가운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 ”
“아이, 아무리 세탁했다지만 어떤 사람이 입었는지 모르는 옷은 나는 싫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수컷을 자극하는 강렬하면서 에로틱한 페로몬냄새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자마자 샤워해서 이상한 상상한 건 아니겠죠. 밖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몸이 꽁꽁 얼어 여기 온 김에 뜨거운 물로 샤워한 거예요.”
“상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남자는 다 도둑놈이라는데 영숙 씨가 나를 너무 도덕군자로 오해하니 도리어 그것이 부담스럽네. 남자는 다 오십보백보라고.”
“아냐. 악어 형님말로는, 절대 순정남이라고. 여자를 허투루 대하지 않는 선비스타일이라고.”
“아이고, 그 말을 믿어요? 형님이 내체면을 위해 치켜세웠던 거지. 다르긴 뭐 다르겠습니까. 난 지금 눈도 아찔하고 심장이 뛰다가 멈춰지는 것 같아 눈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모르겠건만.”
“아유, 지난주에 대팔 씨하고 대팔 이모님, 구씨아재 사모님 노래방 개업날 축하해 주러 갔던 날 기억 안 나 요?"
"그날 너무 마셔서 집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ㆍㆍㆍ"
"에개개 나참 기가 막혀서ㆍᆢ".
"내가 뭘 어쩠길래요"
그녀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존대와 반말로 뒤섞이는 사이 어느새 나 또한 경칭을 생략하고 그녀에게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거리를 두려는 나의 다짐은 말끝마다 매번 무너지고 있었다.
"정말 기억 안 나요? 그날 주인 허락도 없이 내 가슴을 그렇게 오래 봐놓고 또 뭘 더 볼 게 있으시다고 심장이 뛰네 마네.흥, 그날 너무 노골적으로 훔쳐보기에 이모님께 민망해 혼났건마는. 그 정도 봤으면 이젠 그림을 그려도 그렸겠다"
“ 영숙 씨?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아무튼 지금은 보지 않으려 해도 내 눈이 의지대로 안 되고 자꾸 영숙 씨 가슴에만 눈이 가니 그날 확실히 보지 못했던 틀림없는 증거같은데"
상황자체가 어색도 하여 우리는 몇 마디 시시껄렁한 농으로 시간을 보내다보니 안주가 도착하였고 주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몸을 움직이다 보니 자연히 영숙 씨의 머릿수건이 자꾸만 조금씩 흘러내렸다.
샤워를 하며 물이 튈까 봐 긴 머리카락을 감아올려 동여맨 것이었다.
그녀가 수건을 다시 이마 위로 되 올리려고 팔을 담요 밖으로 내밀었다.
그때마다 희고 매끈한 어깨 근을 따라 적당하게 살이 붙은
알맞게 굴곡진 겨드랑이가 도발적으로 눈앞에 노출되었다.
그 순간마다 나의 눈길은 억눌러도 억눌러지지 불씨 같았다.
보지않으려하면 하면 할수록 그 잔상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내 눈앞에서 타올랐다.
뒤이어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뽀얀 젖가슴의 윗부분이 팽팽하게 위로 당겨지면서 아주 오만하게 융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비너스 나신이 바로 눈 앞에서 관능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시선을 둘 길 없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거기엔 더 큰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선 아래는 더 깊은 수렁의 세계였다..
요염한 반가부좌 자세의 하체를 가리기에는 담요가 턱없이 짧았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풍만한 허벅지는 이제 막 터질 것 같이 탱탱했다.
푸른빛과 복숭아빛이 감도는 희고 미끈 하게 굴곡진 종아리가 그나마 남아 있는 나의 이성을 향해 보란 듯이 달려들었다
겨우 엉덩이와 대퇴부만 가리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부족하여 오른편 대퇴부 측은 마치 차이나 치마를 입은 것처럼 거의 드러나 있었다.
얇은 망사 팬티가 아니었으면 허리라인 아래까지 바로 무방비로 맨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허리 아래의 중앙은 나름대로 시야에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비스듬히 다리를 틀어 앉은 자세와 담요의 두께 때문에 앞부분은 어쩔 수 없이 상당 부분 들려 있었다.
그로 인해 양 허벅지와 사타구니 경계선 안쪽의 은밀한 부분이 보일 듯 말 듯 나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않고 있었다.
그나마 천장에서 내려쬐는 낮은 촉수의 형광등 직사광선이 한쪽 귀퉁이를 비추었다. 그 덕분에 구겨진 담요에 짙은 그늘이 생기고 있었다
그 그늘로 만들어진 음영 때문에 여체의 마지막 원초적인 부분은 아슬아슬한 윤곽선만 남기고 옅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관능의 극치는 역시 금기의 경계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한때 화가들을 따라다니며 그림을 한답시고 어설픈 누드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매번 육감적인 젊은 여성 모델을 바로 앞에 두고 인체 데생을 하였지만, 이토록 직접적인 성적인 충동을 느끼지는 않았다.
지금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이 더욱 나의 시신경을 맹렬하게 자극했고, 막다른 상상력은 숨겨졌던 나의 음심에 갑자기 기름을 붓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구 끌려갈 수는 없는 터였다. 나란 인간의 도덕이나 절제심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 가소로움에 치를 떨면서 나름 억지로 정신을 수습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 같은 상황을 눈치라도 챘는지 그녀는 재밌다는 듯 연신 나를 쳐다보며 무어라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온전하게 내 머릿속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삽시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입이 바싹 마르며 나도 모르게 몸이 긴장되었다. 이미 하체의 중심에는 아까 전부터 형성된 열기가 갈 곳을 모르고 아지 못할 힘으로 불끈 서서 죽을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탁자 위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음을 내며 술병과 잔들을 흔들어댔다.
화면에는 ‘구 씨 형님’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상대가 구 씨 형님이라는 것을 그녀가 알아차리도록 스피커폰을 켰다.
“성호야, 큰일 났다. 구청 도로정비과 놈들이 내일 아침 전면 단속 뜬다 카더라. 시장 대행이 본격적으로 행동에들어가는것 같다. 이번에 규모가 크다카는데 아무래도 국제시장 도바 다 쓸어 갈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영숙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담요를 꼭 움켜쥔 채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도발도 농담도 사라지고, 오직 불안만 남아 있었다.
“성호 씨… 어떻게. 오늘 낮까지 아무 예고도 없었는데.?”
하필 이 순 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백열등 불빛이 흔들리며 담요 위에 마지막 음영을 남겼다. 욕망과 연민, 그리고 단속의 공포—세 갈래 불꽃이 동시에 가슴속을 태우고 있었다.
미뤄진 단속
새벽 찬바람이 골목 끝까지 파고들었다. 국제시장 천막 위로 흰 서리가 얇게 내려앉고, 좌판마다 묶어 놓은 끈이 바람에 가늘게 떨렸다. 어젯밤, 구 씨 아재에게서 “내일 아침 전면 단속 뜬다”는 급한 전화를 받아 눕는 둥 마는 둥 눈을 붙였건만, 막상 날이 밝자 골목은 의외로 고요했다. 지글거리는 기름 냄새, 김 서린 어묵 국물, 그 사이사이로 묵은 걱정이 깃털처럼 퍼져 앉아 있었다.
“형님, 오늘 큰일 난다 카더니 웬일입니꺼?” 대팔이가 팔짱을 낀 채 구 씨를 흘겨봤다.
구 씨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야, 구청 놈들이 시청 눈치 본다 카더라. 전 시장 출마 선언 맞춰 쇼 한다고 날짜 슬쩍 미룬 거라. 이번 주 안엔 무조건 온다, 이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한숨과 욕설이 뒤섞였다. “괜히 가슴만 콩닥콩닥하게 만들고….”
“그래도 설레발이 약 되는 거라. 준비라도 하잖아.”
오전 내내 단속은 오지 않았다. 대신 “단속반 떴다!”는 누군가의 헛소리에 좌판을 접고 박스를 쓸어 담는 소리가 파도처럼 번졌고, 잠시 후 골목에 들어온 트럭 옆면의 글자—가스 안전 점검—를 확인한 뒤엔 욕 섞인 한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때 한 노점상 노인이 좌판 앞에서 쓰러졌다. 뜨거운 국물이 쏟아지고, 상인들이 달려가 부축했다. 노인은 간신히 눈을 뜨더니, “놀라는 것도 힘이 드네.” 한마디 남겼다. 사람들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단속보다 더 무서운 건 불안이 반복되는 삶 자체였다.
협박의 그림자
그날 저녁, 다방으로 가는 길에 영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부터 이미 지쳐 있었다.
“성호 씨… 오늘만 세 통이에요. 또 왔어요. 문자도 계속…”
잠시 후 그녀와 마주 앉았다. 다방 창문 너머로 네온사인이 비쳐 들고 있었으나, 영숙의 얼굴은 빛을 받지 못한 종이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당신은 이혼 전 동거녀일 뿐이다. 법적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재산 다 내놓고 위자료까지 물어내라.〉
〈돈을 내놓지 않으면 성호 씨와의 관계를 신문사에 흘리겠다.〉
문자 속 문장은 칼날처럼 짧고 날카로웠다.
“저 아파트마저 빼앗기면, 어머니랑 어디서 살아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에요. 그냥… 다 포기하고 일본으로 갈까 싶어요.”
곁에 앉아 있던 영숙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눈은 보지못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
“영숙아, 걱정 말거라. 성호 씨가 알아서 해주실 게다. 저건 겁주는 소리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손을 감싸며 말했다.
“영숙 씨, 들어요. 이미 아파트는 영숙 씨 명의로 이전됐습니다. 법적으로 저건 설득력이 없어요. 판례만 찾아도 금방 확인할 수 있어요. 내일 도서관에 가서 직접 찾아볼게요. 근거를 갖고 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도서관에서 무릎을 치다
다음 날 오전 나는 도바를 쉬고 모교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건물 안, 법학 자료실은 여전히 고시 준비생들과 논문 준비생들로 붐볐다. 종이 넘기는 소리, 연필 긁적거리는 소리가 뒤엉킨 공간에서 나는 곧장 민사법 코너로 향했다.
두꺼운 판례집을 뒤적이다가 마침내 손끝에 밟히는 활자가 있었다.
〈대법원 1990. 9. 25 90므 123 판결〉
〈 법률사실 혼 관계의 배우자가 사망 시 그 일방은 법률상 배우자가 아니므로 그를 대상으로 상속권 및 재산분할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탁’ 치며 속으로 외쳤다.
“됐다. 이거다.”
복사기를 돌리며 따끈한 종이가 배출구에 쌓였다. 흰 여백 속에 밤의 걱정이 한 줄 한 줄 벗겨지는 듯했다.
포장마차의 안심
그날 저녁, 포장마차로 영숙 씨를 불러냈다. 그녀는 여전히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으나, 낮보다는 조금 차분해 보였다. 나는 가방에서 꺼낸 판례집 사본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봐요, 영숙 씨. 이게 대법원 판례입니다. 1990년 9월 25일 선고, 사건번호 90므 123. 똑같은 사례인데, 법원은 전처 측 주장을 기각했어요. 이미 아파트는 영숙 씨 명의로 이전이 끝났으니 더는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숙은 사본을 덥석 잡아 활자를 손끝으로 더듬듯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이게 확실한 거예요?”
나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친척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 변호사님, 법률상 배우자라는 이유로 그 배우자 사망 시. 상속 또는 재산권을 이제 사망으로 사실혼관계 해소된 상대방에게 주장할 수 있습니까? 대법원 1990년 사건번호 90므 123 판례 보면 이미 기각된 걸로 나오잖아요.”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단호했다.
“맞습니다. 대표적인 판례입니다.
사실혼관계는 배우자 일방 사망 시 법적인 관계는 모두 해소됩니다.
법원은 일관되게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미 명의 이전이 끝났다면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그제야 영숙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마침내 입술이 떨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제 괜찮은 거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판례도, 변호사도 우리 편이에요. 오늘은 안심하고 주무셔도 됩니다.”
그녀는 그제야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어깨가 조금은 풀어졌다.
과거와 현재
잠시 후, 그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듯 긴 이야기를 꺼냈다.
“악어 살아 있을 때는… 제가 더 과단성이 있었어요. 다방이든 장사든, 뭐든 밀어붙였죠. 원피스 자금이 모자라면 제가 바로 결정했어요. ‘안 되면 내 책임이다’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뭘 하나 결정하기도 겁나요. 그냥… 성호 씨만 의지하게 돼요.”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과거의 대담함과 현재의 위축, 그 극단의 간극이 내 눈앞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대각사의 목소리
그날 밤, 나는 대각사 돌계단을 올랐다. 향 냄새가 은근히 퍼졌고, 법당 안은 촛불빛으로 따뜻했다. 명상을 마치고 나오는데, 주지 스님이 차를 내왔다.
“성호 씨, 이번에도 정치판이 묘하게 돌아간다더군. 여당은 전 시장 카드를 꺼내고, 전시장은 자신의 아바타를 내세우고 야당은 아직 인물이 없대지.”
스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일이란 게 그래. 바람이 잦을 때는 고요한 듯해도 밑에서는 이미 물길이 돌아가고 있는 법이지.”
나는 스님의 말을 들으며, 낮에 본 판례집 활자가 머릿속에 겹쳐졌다. 법은 느리지만, 바람보다 오래간다. 그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끝내지 못한 긴장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니 창밖에는 반달이 걸려 있었다. 그 달빛 아래서 메시지가 울렸다.
〈성호 씨, 제 문제는 이제 안심되지만. 성호 씨와 노점 때문인지. 오늘은… 잠이 오지 않네요.〉 영숙이었다.
나는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내일은 다시 골목이 뒤집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밤만큼은 그녀의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걱정 마세요. 이미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내일 웃으면서 봐요.〉
창틀이 바람에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멀리서 이 밤 어디로 화물을 싣고 떠나가는지 트럭 엔진 같은 소리가 골목 위로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