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바위에 뜬 별 2부 제12화
영숙 씨가 타고 다니던 소나타를 그랜저로 바꾸었다.
시승을 겸한 드라이브에 나를 불렀다.
진즉 함께 새 차를 타보자던 약속이었지만, 악어형님 전부인이 재산 양도를 해달라며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뤄졌던 일이었다.
모처럼 둘만의 만남이라 나는 드라이브보다 중동집 포차에서 술이나 한잔했으면 했다.
그러나 영숙 씨는생각이 달랐다.
“오늘 달이 참 밝대요.
태종대로 가서 밤바다 위에 뜬 달을 보면 좋을것 같은데 .그렇죠”
모처러의 부탁이자 제안을 선뜻 거절할 수는 없었다.
차는 도심의 불빛을 벗어나 영도대교를 건넜고, 곧 한적한 해안길로 접어들었다.
동삼동 해양대학교를 지나자 차 안으로 바다 냄새가 밀려들었다.
라디오에서는 클래식 기타 선율이 낮게 흘렀고, 창밖 검푸른 파도 위로 달빛이 잔잔히 부서지고 있었다.
태종대 입구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 오후 8시 이후 출입 금지
나는 이쯤에서 돌아가자는 뜻으로 영숙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속도를 늦췄다가, 이내 다시 가속페달을 밟았다.
“괜찮을 거예요.
그냥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되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요?
혹시 검문하면… 그때 돌아가면 되죠.”
도로는 달빛에 젖어 있었다.
바다를 끼고 도는 길에서 파도 소리가 차창을 두드리듯 들려왔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군복차림의 위병 둘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손전등이 원을 그리며 우리 차를 가로막았다.
빛이 차 안을 빠르게 훑었다.
“정지! 멈추세요!”
손전등 불빛이 차창에 부딪히며 눈부신 섬광을 쏘아냈다.
영숙씨가 두 손을 핸들에 올린 채 순간 움찔했다.
위병 하나가 창문을 두드리며 고함쳤다.
“지금 시간에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알지 않습니까? 내려서 확인 좀 해주세요!”
뒤이어 다른 위병이 차안을 기웃거리며 히죽 웃으며 듣기 부담스런 농을 내뱉었다.
“여자 데리고 와서, 여기서 뭐 하려는 거 아입니까? 하하, 재미 좀 보려는 거 같은데?”
영숙씨의 손끝이 핸들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자존심 강한 그녀로서는 심한 모멸감을 받을 농짓거리였다.
나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였다. 말없이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삐걱 소리와 함께 찬 바닷바람이 차 안으로 몰려들었다.
하얀 달빛이 건너편 절벽아래에 부딪혀서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달빛을 등진 내 그림자가 길게 위병들의 군화 앞까지 드리워졌다.
나는 위병 한 명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봐, 여기, 기지 방어부대소속 맞지, 지금 당장 야간당직 불러와.빨리 "
위병들은 순간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방금 전까지 농담을 던지던 입술들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한 명이 허겁지겁 초소 안으로 달려틀어갔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지갑에서 기자증을 꺼내서 위병 눈앞에 흔들었다.
“자네 방금, 민간인 검문 중에 규정도 어기고 희롱 발언을 했지.
기사로 나가면… 너희 이름, 소속, 다 실린다.”
위병의 목젖이 꿀럭거렸다.
군화 발끝이 덜덜 떨리고있었다.
잠시 뒤,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도 못한 당직장교가 허겁지급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오! 한밤중에—”
그러나 기자증을 보는 순간, 목소리가 힘을잃고 이미 중간에서 꺾였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입에 물고있던 담배에 그때서야 불을 붙였다.
“당신 부하들이 민간인 검문시에 희롱발언을 했는데. 평소에도 이런식으로 근무하세요? 하는 작태를 보니 거의 상습적인것 같은데. 바리케이트도 제대로 없이 일부러 통과시켜놓고 불쑥나타나지않나. 이 건 그냥 넘길 사안은 아닌것같은데 내일 사령부에 확인차 들어가봐야겠네"
내말이 끝나자마자
당직장교는 절도있는 차렷자세로 발뒤꿈치를 모았다.
“기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부하들은 엄중히 문책하겠습니다.
제발, 기사화만은 고려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저희 부대장님이 며칠 뒤면 전역입니다 ”
그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었다.
내 입에 문 담배가 다 탈 때 까지, 그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달빛이 그의 등위에서 싸락눈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자세 그만 바로 하세요. 오늘은 그냥 넘어갑니다.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 해안초소 군기를 엄중하게 부탁 드립니다.”
부대장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차가 출발하기 직전,
부대장이 다시 뛰어와 경례를 붙였다.
그는 창문을 내려 달라는 듯, 두 손을 모아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기자님… 오늘은 임시 출입증을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시면 보름달을 보기 좋은 지점이 나옵니다.
마침 오늘이 보름이라서요.
두 분, 잠시 다녀오십시오.
이 구간은 야간 통제 중이니, 출입증 소지 상태로만 이동 부탁드립니다.”
위병 하나가 서둘러 출입증을 작성해 가져왔다.
달빛이 종이 위에 내려앉아, 마르지 않은 잉크를 은빛으로 감싸고 있었다.
부대장은 허리를 깊이 숙인 채 그것을 내밀었다.
“부디… 조심히 다녀가십시오.”
차가 다시 움직였다.
음악을 언제 껐는지, 차 안은 조용했다.
운전석의 영숙씨는 말없이 정면만 보고 있었다.
기자증은 가짜가 아니었다.
주간 신문을 차린 선배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오일장을 돌며 주차위반 딱지를 하도 많이 끊긴다고 투덜대자,선배가 웃으며 하나 만들어 줬다.
객원기자라는 이름으로, 가끔 특집 기사 하나쯤 써 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영숙씨에게 그런 구구한 사정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달은 어느새 공중 높이 떠 있었다.
바다는 그 아래서 검푸른 몸을 뒤척거리고 있었다.
차는 그대로, 달빛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