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복도로 위의 소녀 3.

도바위에 뜬 별 2부 제11화

by 손병호



현희 네집


좁은 골목 벽마다 오래된 영화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아이들 웃음소리와 라디오 음악이 섞여 흘러나왔다.

언덕 꼭대기쯤에서, 나는 한숨 돌릴 겸, 발을 멈추고 담배에 붙을 붙였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이 어둠에 밀려 승학산 너머로 쫓겨가면서 그 장엄한 흔적을 검푸른 바다 위로 흩뿌리고 있었다.

자갈치 부두에는 먼바다 출어를 앞두고 수십척의 원양어선들이 일렬로 긴 대열을 만들며 정박해 있었다.


그 선단들 위로, 저물어가는 하루의 피로를 시원한 바닷바람에 씻기라도 하듯 긴 타원형 원을 그리며 저공비행을 하던 갈매기 떼들이 영도다리를 지나 북항 방면으로 날갯짓을 시작했다.

갈매기 무리들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짙붉은 페인트 부산대교를 넘나들며 북항 쪽을 향해 서서히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중앙동 세관옆 국제페리부두를 막 빠져나온 호화여객선이 오륙도를 향해 서서히 속도를 올리고, 제3 부두에는 거대한 컨테이너선들이 수출화물의 육중한 무게에 눌려 가쁜 숨을내시며 연신 부우우 부우우우 긴 뱃고동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산비탈 언덕으로 올라갈수록 어둠이 내 어깨 위로 내려 앉았다, 발아래 애기들 신발같이 작은 선박들과 그 선실창으로 새어나온 희미한 불빛들이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저마다 흔들리고있었다.


누추한 골목 어느 집에서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지금 들으신 곡은, 조용필의 모나리자였습니다—”


낡은 벽돌담에 걸린 스피커는 쉰 목소리로 노래의 끝을 알려주고 있었다.


주소에 적힌 ‘289-7’이라는 숫자가 낡은 검은색 판잣문 위에 눈에 잘 띄는 하얀색 크레용으로 쓰여 있었다.

대문이라기엔 허술한 판자였고, 문짝 위쪽은 이미 떨어져 나가 틈이 벌어져 있었다.


문틈 사이로 싸리빗자루 몇 자루가 기대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누군교?”


안쪽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나왔다.


“여기가 정현희 학생집 맞죠.

부경은행에서 왔습니다. 오늘 낮에 손녀가 다녀갔는데요.”


방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래된 반팔 티셔츠와 짙은색 몸뻬바지를 입은 육십후반 할머니가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빼곡이 내다보다 낯선 나를 보고 놀란 듯 일어선다.



“아이고, 은행서 우째 여기까지 왔어예?”


“예. 잠깐 뵙고 말씀드릴 게 있었어요.”


방 안으로 들어서자 싸리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한쪽 벽에는 빗자루용 싸리단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엔 낡은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어디에 사용되는지 모르지만 닭털이 반쯤 담긴 푸대자루가 입을 벌리고 방한구석에 있었다.


바닥은 깨끗이 쓸려 있었지만 군데군데 갈라진 장판 사이로 구들장을 발른 시멘트가루가 뽀얗게 일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


방안은 허름했지만 정갈했다.

그 속에서 가난하지만 올곧게 살아온 할머니의 긍지심 담긴 손길이 느껴졌다.


“우리 옆집 사람 말로는 현희 갸가 오늘 낮에 은행 갔다가 울면서 왔다 다시 핵교로 갔다 카더만, 혹시 갸가 은행에서 무슨 잘못한 일이 있었습니꺼?”


“아닙니다. 잘못한 일이 아니라? 통장에 예금이 전부 다 인출돼서요. 현희 씨 말로는 어머니가 다녀가셨다는데, 전표를 확인해 보니 여자분 글씨체가 맞더군요.”


“아이고 우짜겠노, 또 그 인간이 그랬나… 에미란 년이 지 딸 핵교 공납금을ᆢ ”

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가슴을 치며 한탄 섞인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누가 예금통장 돈을 …”


“내 딸이요. 우리 현희 에미.”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희 아버지말로는 지에미에게 매달 아이 수업료와 생활비는 빠짐없이 보내준다카던데. 근데 그 돈을 우리한테 한 푼도 안 줍니다.


내가 싸리 빗자루 팔아서 현희하고 두식구 뽀도시 먹고사는데 , 요새사 플라스틱 빗자루도 나오고 진공청소기 니 뭐니 새 물건들이 많이 나오니…


그것들 때문에 빗자루 장사는 다 망했습니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서러움이 깔려 있었다.


“ 근데 인자는 우짜고? 아이고, 복도 없지. 에미 잘 못 둔 죄로 우리 불쌍한 손주 새끼. 학교도 못 보내게 되었네. 그 미친 인간이 노름에 중독되어 지 새끼 학교 월사금까지 갖고 날라 버렸으니? 기가 차네예"


"어디로 가셨는지 주소라든지 집을 찾을 수 있다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 지말로는 하우슨가 뭔가 하는 노름방에서 잔심부름해 주며 먹고 잔다카는 데. 어딘지도 안 가르쳐주고. 알아볼라 해도 물어볼 데도 없심더. 온 사방에 빚쟁이들이라 주소가 있다 손 치더라도 지가 이야기 할라카겠슴니꺼?


어제 아침에 내를 찿아와서 급히 십만 원만 달라해서 없다 캤더니, 그새 통장에 돈을 빼 갔는 모양이네. 아이고. 으짜겠노."


" 앞으론 통장은 현희하고 할머니만 아는 곳에 따로 잘 보관하셔야 할 겁니다."


" 은행양반, 내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외손녀가 공부를 곧잘 한다오. 학교에서 반장도 하고. 제 딴에 빨리 고등학교진학 해가지고 은행에 취직하여 이 할미를 돕겠다고 기를 쓰고 공부하는데 ㆍㆍ 어휴 불쌍해서 어쩌나. 혹시 은행에서 돈을 좀 빌릴 수 없을까? 이 집이라도 잡혀준다면서야ㆍᆢ"


“ 아이, 어르신.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래서 제가 조금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나는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건 제 개인 돈입니다. 아무런 걱정 마시고 현희 수업료로 써주세요.”


“아이고, 그럴 순 없지예. 은행에서 빌려주는 것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은행 총각 개인 돈을…”


“괜찮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일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몇 번을 사양하며 돈봉투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때 문이 삐그덕 열리며 현희가 들어왔다.

손에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양손에 싸릿대를 한 움큼 들고 들어왔다


“할머니, 저 학교 마치고 오는 길에 산에 가서 싸릿대 꺾어 가지고 왔어요.”

현희가 방 안의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어머, 아저씨. 진짜로 오셨네…"


“그럼, 내가 현희 학생에게 걱정 말라고 했잖아. 학교에서는 뭐라 하던가요?”


“수업료는 다음 주까지 연기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됐네요.”


할머니가 현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행 아저씨가, 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


현희는 부끄러운 듯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표정이 무슨 잘못이라도 지은 아이 같았다.


나는 일부러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 싸리빗자루는 직접 만드시는 겁니까?”


“예. 산에 가서 꺾어오기도 하고 새벽 시장 가서 싸리단 사 오기도 합니다..

요새는 싸리도 귀해졌어요.

세상이 바뀌어 찾는 사람도 드물고.


얼마 전부터는 빗짜루가 잘 안팔려 팔면서 혹시나 돈이 될까 하여 달구털로 차 먼지떨이라도 만들어 팔아보려고요. 저렇게 달구 털을 얻어다 놓았는데, 내가 눈이 어두바 잘 만들수있을란가 모르겠네예..”


할머니는 낡은 재봉틀 옆에 앉아 낯선 내게 하소연하는것이 쑥쓰러운지 자꾸 빗자루 손잡이를 매만지고계셨다.


나는 봉투를 다시 할머니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현희 할머니 제발 받아주세요. 다음 분기까지는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고, 이걸 어째... 너무 고맙고 미안스럽심니더 ”


“아닙니다. 그냥 제가 마음이 내켜 조금 도와 드리는것 뿐입니다.”


현희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저, 꼭 갚을게요.”


“갚을 필요 없어요. 현희는 공부만 열심히 해”


“그래도요…”


“그럼 나중에, 누군가 힘든 사람을 보면 그때 그 사람을 도와주면 되는 거지. 그걸로 이 돈 갚는 겁니다.”


방 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이들 할머니와 손녀와 같이 있는 순간이 내게는 낯설다기 보다 도리어 편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밖에서는 지나가는 바람이 판잣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와 함께 남항의 저녁 불빛이 따스하게 현희네 유리창에 스며들었다.

열려진 방문밖으로 멀리 부산대교의 가로등들이 한 줄로 켜지며, 그 불빛이 바다 위로 퍼져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현희학생, 학교 잘 다니고.”


“예.”


“할머니는 몸 조심하세요. 싸리 꺾느라고 위험한 데 가실 때는, 혼자 가시지 마시고 현희 꼭 데리고 가세요.”



산복도로 아래쪽 밤바다 불빛들이 반짝였고,

어둠이 깔린 남항의 바다에서는 배의 경적이 또다시 길게 울렸다.



나는 길을 내려가는 도중, 계단 중턱에서 잠시 멈춰 섰다.


멀리 부산시청 옆으로 높은 빌딩들이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찬란했지만, 내 발 아래의 골목길은 조용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다정한 이웃은 말에 그칠 뿐


다음 날 아침, 은행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내가 서무계에 돈을 빌려 어떤 학생의 수업료를 도와주었다는 소문이 이미 퍼져있었다.


지점장 대신 차장이 아침 조회를 진행했다. 평소에 강조하던 친절. 미소가 아닌, 직장 내에서 공과사를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는 애매한 말로 조회가 끝이 났다.


오전 업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직속 상사인 김대리가 나를 불렀다.


“한 주임, 어제 그 학생 일은 잘 정리됐나?”


“예. 제가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지점에 폐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럼 잘됐고. 근데, 한 주임, 니 앞으로는 그런 일 나서지 마라. 은행은 감정으로 일하는 데가 아니다”


“예? 무슨 말씀 이신지? ”


“ 그 학생이 다른데 돈을 쓰고 은행에 와 돈 없다고 하면 한 주임이 또 도와줄 거가? 내가 듣기로는 일부직원들이 돈 모은다카는 소문도 들리던데. 그건 은행 안에서 하면 안 된다.


여긴 직장이지. 사회사업 하는 곳이 아니야. 잘 들어. 이건 꼭 내 뜻만이 아니야 오늘 아침 간부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이니 알아서 처신하고. 괜히 이 판에 나까지 피곤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할 가치를 아예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세상사에 능통한 사람인 듯 한마디 덧붙였다.


“한 주임, 세상은 말이다, 불쌍한 사람 다 도와줄 순 없어.


그런 식으로 정 들이면 은행이라는 이 직장에서 오래 못 버틴다.”


“…….”

“우리 은행 일은 냉정해야 해. 냉정해야 신뢰도 생긴다.”

일일 보고 결재받으러 간다며 그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냉정이 신뢰를 만든다고ㆍㆍㆍ? 은행 간판마다 자랑스레 붙어있는 부경은행 상징표어인 '여러분의 다정한 이웃'이라는 말이 참으로 무색했다.


도움의 손길


서류철을 넘기다 창구 바깥을 보았다.

점심 전이라 손님이 뜸했다.


은행 로비 저편의 유리문 밖으로는, 새로 세운 건물의 유리벽이 유독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바다 쪽에서는 기중기가 높이 솟아, 부두의 화물을 옮기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유사 이래 최고의 호황기라 했다.

신문마다 ‘수출 대박’, ‘5천 달러 시대’라는 제목이 실렸고,


중앙동엔 매주 새 빌딩이 올라갔다.

부산은 그야말로 번쩍거렸다.


그날 오후 한가한 틈을 타, 나는 잠시 여직원 회장인 성양 누님과 이층 식당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 얄궂어라. 우리 한주임이. 늙은 노처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렇게 보자 했을꼬? 혹시 아까 김대리 하고 둘이 표정이 안 좋던데 그일 때문이가, "


“누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제 그 학생 일ㆍㆍㆍ”


“예. 사실 그 학생 집이 좀 심각합니다. 싸리빗자루 팔아서 근근이 살아간다 카는데, 요새는 그 일 마져도 플라스틱 빗자루가 다 밀어냈다고 하더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


성양누님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서무계 보조 김양에게


"가시나야. 뭐 듣고 있니? 커피나 두 잔 가져 오너라. 그리고 너희 서무대리가 물어도 니는 아무것도 모른다 해라. 알겠니"


누님은 내게도 커피 한잔을 건네며 지금까지 어투와는 달리 진지하게 말했다.


“ 조금 전에 김대리가 하는 말, 나도 다 들었어. 칫, 개구리 올챙이시절 모른다고.

사실 손주임이야 가정환경이 좋아 대학을 다녔는지 모르지만.


우리 지점 직원들, 거의 다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사람들이야. 그래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상고나 여상을 다녔던 거고. 어떻게 같은 처지에서 도와주지는 못할 만큼 그런 심한 말을 해."


"저도 그 부분 사실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저도 넉넉한 집안이 아니어서 쉽게 공부하진 못했거든요."


성양누님이 무슨 생각이라도 하듯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한 주임은 차장과 대리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어. 그러니까 여기서 이만 빠져.

사실 어제, 그 여학생이 너무 안되었다고 창구담당 텔라 여직원들끼리 의론이 있었거든, 이번 일은 내가 우리 여직원회와 힘을 모아 볼 테니. 걱정 마"


그녀는 조금 전 표정과는 달리 꽤나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수첩을 꺼내 뭔가를 메모하며 내게 말했다.

"우리 여직원회 경조사비 하려고 모아둔 돈이 제법 있어. 그리고 두어 달 회식 한번 안 한다 치면 충분히 도움 될걸"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됐어. 옆에서 뭐라 해도 손주임이 이번에 한 일은 옳은 일이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 인데 뭘 ”


은행 출입문셔트가 내려가고 업무가 마감되자 되자, 성양 누님과 고참 여직원 세 명이 나를 불렀다.


“여기. 우리가 모은 십만 원이야 오늘 그 학생에게 우리를 대신하여 전달해주면 고맙겠어.”


“이렇게까지…”


“괜찮아. 놔둬. 다들 한때 등록금 모자라서 힘든 적 많았던 사람들이야.”


그때 옆에서 한참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무계 김주임이


"지금 이사람들이 서무주임을 뭘로 보고 말이야.하하. 나도 많지는 않지만 좀 보태줄게” 하며 거들고 나섰다.


“김계장 도?”


“그래. 몰랐으면 모르지만. 의미 있는 일 한다는 데 당연히 도와야지. 그리고 김대리 말에 신경 쓸 필요 없어, 대리들은 행원들이 뭉쳐 단결하면 지네들이 앞으로 피곤해지니 괜히 나서는 거야. ”


그는 곧바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이 돈도 학생한테 전해줘. 한 분기 수업료는 될 거야”


그 순간만큼은 은행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과는 다른, 조금 따뜻한 곳처럼 느껴졌다.


그날, 평소보다 손님이 적은 탓에 보통계 창구 텔라들의 정산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당일 입금과 지급 총합보고를 끝내고 난 뒤 김대리가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한 주임, 니 지금 무슨 짓거리 하고 다니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원들에게 돈 거둔다면서, 당장 거둔 돈들 돌려주고 그만둬. 아침에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그거 그만둬. 위에서 알면 진짜 곤란하다. 직장을 구세군 냄비로 만드는 것 도 아니고 말이야. 굳이 도와 주려면 조용히 혼자해”


“개인 돈들이고, 돈을 거두는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도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 손님들 중에 그런 얘기 들으면 오해한다.”

그는 제법 자신만만한 어조로 자신의 철학을 강조하듯 말했다.


“세상은 말이야,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아. 그 학생, 어제 울었다고 오늘 또 울지 말란 법 있나?”


“그건 그렇지만…”


“더우기, 자네는 신입이야. 함부로 처신하지 마. 지금 인사고과 시기인 줄은 알고 있지 ”


"그래요. 근데 이 일하고 인사고과 나 신입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지금까지 그냥 선배이고 상사로써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이건 분명히 해주면 좋겠습니다."


"뭐? 뭐라고!"


"이 일은 순전히 업무외적인 내 개인적인 일입니다. 김대리님이 간섭할 문제가 아닙니다. "


" 이건 직속 상사로서 명령이야."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업무와 무관한 일입니다. 설혹 만약 제가 하는 일이 은행에 누가 되고 업무상 문제가 있다면 인사상 불이익은 받든 말든, 제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업무인지 아닌지 그렇게 분간이 안되신다면 지금 바로 지점장실로 같이 갑시다. 상황 보고 하고 정당한 업무지도 받아볼까요 "


그는 내 말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뻘게져 애꿎은 담배만 뻑뻑 꺼리며 빨아댔다.

대리들과 차장은 내게 비우호적이었지만 지점장님만은 늘 내게 우호적으로 대해 주어 왔기 때문이었다.


"따로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번엔 제가 사적으로 한마디 하죠. 앞으로 추잡한 짓 하지 마세요. 이층 올라가던 복도에서 만만한 신입여직원들 엉덩이에 손 좀 올리지 말라 말입니다.


한 번만 더 못 된 손 짓이 내 눈에 띄면 노조 분회 모임에서 공론화할 겁니다. 그리고 자신 있으면 제 인사고과, 김대리 마음대로 한번 해보십시오. 누가 더 힘이 있는지"


그 무렵. 나는 은행본부의 한 모 전무이사와 가까운 인척 관계라는 묘한 오해를 받고 있었다.


사실 한전무는 나와 가까운 고교동기의 큰 자형이었다. 내가 입행하자마자 친구가 그의 자형에게 "친구가 지점에서 너무 고생하는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내가 시키지도 않은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지점장은 전무로부터 전화상으로 "나를 잘 부탁한다"는 의례적인 말을 들었고. 그리고나서 내게 "전무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다시 되물었다.하필 같은 한 씨 성씨이다 보니 전무님과 가까운 사이라고 오해를 사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음 날 퇴근 후, 나는 서무계 김계장과 함께 다시 현희네 집으로 갔다.

비가 내릴 듯한 하늘 아래, 산복도로는 여전히 가팔랐다.


할머니는 우리가 들어서자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또 오셨네예.”


“예. 이번에는 은행 여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마음을 모아 왔습니다.사양하지 마시고 꼭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는 방안으로 들어오라는 할머니의 말에 바쁘다고 핑게를 대며 마당에 선 채로 봉투를 내밀었다.


“현희 할머니, 이 돈이면 한동안은 괜찮으실 겁니다.”


“한 번도 아니고 도 이렇게 큰 은혜를 이 은혜를 어찌…”


“할머니, 현희가 학교 잘 졸업하고 공부로 갚으면 됩니다.”


현희가 방 안에서 나와 인사를 했다. 옷 소매가 닳아 있었다.


그 후,현희는 꾸준히 소액을 저금하러 창구에 나타났다. 여직원들은 전처럼 나를 놀려대지는 않았다. 되려 교대로 현희를 데리고 나가, 점심이나 간식을 사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현희는 내게는 눈 인사만 하고 언니들에게 가서 통장을 내밀고 있었다.



해가 두번 바뀌었다.

나는 중앙동 국제 외환업무부에서 수출입금융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수출입업무와 관련된 거래처 외 일반인 고객은 상대하지 않는 업무였다.


어느 날, 오후.

청원경찰이 삼십 대 후반의 건장한 남자가 건물 지하다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업체 담당자가 지난번 처럼 부정한 청탁이라도 하러 온건 아닌가 긴장하며 다방으로 들어섰다.내 걱정은 기우였다.


청원경찰이 전달한 말 그대로 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구릿빛 얼굴에 체격이 당당한 건장한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한 주임님 맞으십니까?” 하며 두 손을 내 밀어 악수를 청했다.


“예, 제가 한 주임입니다만”


“재작년 여름, 영선동지점 계실 때 우리 집 아이 도와주신 분 맞죠?”


“혹시… 현희 아버님이십니까?”
“예.맞습니다. 제가 너무 뒤늦게 알았습니다. 늦게 와서 정말 면목없습니다. 어쨌든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직접 뵙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그는 외모와는 달리 매우 수줍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때 우리 아이 도와주신 돈입니다. 늦어져 죄송합니다.”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 아닙니다. 이 돈 받을 수 없습니다. 받으려고 현희를 도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너무 많습니다.”


“남는 돈은 그때 같이 힘써 준 직원분들 회식에 써주이소."


그는 사양하는 나에게 한사코 돈을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하고 떠나갔다.


그가 떠난 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그를 국제시장 첫날, 노점에서. 그것도 내 도바를 직접 만들어 주었는데도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나를 분명히 알아보았었다. 다만 과거의 지나간 일을 굳이 들추지 않았다.

국제시장을 주름잡던 뚝심 있고 카리스마 작열하던 악어 형님,

그에게도 딸에 대한 고마움으로 몇 번이나 고개 숙이던 수줍은 남자의 표정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현희가 나타나지않았더라면 나는 언제까지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숙녀가 된 현희를 만났던 그날 밤.

나누 젊은 시절의 추억이 생각나 영도 산복도로에서 시작하여 목장원 까지 해안도로를 걸었다.

바다 위로 떠오른 달빛이 부서지고, 해안기슭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중학생 현희와 할머니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파도소리 사이로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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