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남이 이야기 3.

도바 위에 뜬 별 2부 제15화

by 손병호

기자 시절, 리포터로서 라디오 스튜디오 출연 경험은 있었지만 TV 는 처음이었다. 귀남이 사연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매몰되다 보니 별 긴장되는 마음없이 스튜디오 중앙 의자에 앉았다. 바닥에 붙은 흰색 엑스 표시 위였다.


카메라 세 대가 동시에 나를 겨누고 있었다. 검은 렌즈는 한낱 무심한 유리알에 불과했지만, 내게는 수십만 명의 눈동자가 겹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붐 마이크가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조명은 점점 뜨겁게 쏟아졌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그러나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스탠바이 라이트!”

조명 감독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키라이트 고정, 필라이트 안정화!”

“라발리에 클리어, 붐 포지션 굳혔습니다!”

마지막으로 PD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레디…”

스튜디오 벽면의 빨간 불빛이 켜졌다.


ON AIR.

FD가 손을 내리며 외쳤다.

“큐!”


2. 첫 마디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시청자 여러분, 저는 부산 국제시장 골목에서 장사로 생업을 유지하고 있는 이른바 거리의 장사꾼인 일개 노점상입니다.


오늘 저는 시청자 여러분께 노점상인 제 이야기를 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제 이야기 대신에, 어린 나이에 할머니를 도와 장사를 하는 귀남이라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전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내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점점 울림이 커졌다.

“귀남이는 열 살 소녀입니다. 늘 할머니와 함께 골목에 나와 작은 손으로 고구마 줄기 껍질을 까고, 메주나 된장을 팔며 웃음을 나누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귀남이는 병원 침대 위에서 이름조차 듣기 무서운

소아암, 백혈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환하게 웃는 귀남이의 얼굴이었다. 사진을 카메라 앞에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귀남이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곁에 없습니다. 오직 할머니 품에 자라왔습니다. 황 할머니는 새벽마다 산비탈에서 시금치를 뜯어와 장터 모퉁이에서 작은 보자기를 펴놓고 하루를 버텼습니다.

그런데 지금, 손녀가 병원에 누워 있는 걸 보면서도 약값 한 번 내지 못하는 게 그분의 현실입니다.”


3. 목소리의 떨림

말을 이어가려는데 목이 메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카메라 렌즈가 내 눈물 맺힌 눈을 클로즈업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원고에 있던 ‘시청자’라는 표현을 ‘시민’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하고 있었다. ‘시청자’라는 단어는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귀남이에게 있어서는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귀남이를 위해, 시장 상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여과 없이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과장도, 과잉 감정적 표현도 필요 없다. 오직 진실된 사실을 전달하고 도움을 호소할 뿐이다.


“시민 여러분, 저는 거리의 장사치라 평소 같으면 이런 거창한 질문을 해 볼 생각도, 여지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저는 감히 묻고 싶습니다.


국가의 존재와 사회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리 힘든 노점상들에게 늘 웃음을 주어왔던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 귀남이는 이제 겨우 열 살, 꿈 많은 어린 소녀입니다. 그 아이와 아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할머니의 굽은 등을 위하여 국가와 사회는 과연 무엇을 해왔습니까.


아픈지, 굶는지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국제시장 구석진 장터 모퉁이에서,

외롭고 힘든 할머니를 위해 고사리손으로 고구마 줄기를 다듬던 그 아이.


우리가 아니, 국가와 사회와 이웃이 외면했던 아이.

의사는 충분히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 아이가 사회의 외면 속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기는 커녕

이기적이다 못해 그 아이에겐 차마

적대적인 사회의 그늘 속에서 시들다

지금 이 시간에 꺼져 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그래도 저희 노점상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버릴 수 없었습니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등 인근 노점상들이 주축이 되어 시장 상인들과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저희들에겐 기적 같은 돈, 불과 일주일,

짧은 기간에도 500만 원이라는 큰 돈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귀남이의 치료에는 아직 더 큰 돈이 필요합니다. 천만 원이 더 필요합니다.


시민 여러분!

귀남이를 제발,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대로 어린 나이에 노점 할머니 곁에서 고사리를 다듬고 고구마 줄기 껍질만을 벗기게 하다가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아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이는 이제 열 살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내 목소리는 떨렸고, 손은 무릎 위에서 꼭 쥐어졌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4. 스태프들의 눈시울

내 말이 이어지는 동안, 스튜디오 공기가 달라졌다고 들었다. 조명 기사 한 사람이 몰래 고개를 돌려 소매로 눈물을 훔쳤고, 붐 오퍼레이터의 팔도 흔들렸다고 했다. 녹화를 마칠 때, 콘솔 앞의 사운드 엔지니어가 헤드폰을 벗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PD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이미 프로그램을 넘어서 있었다. 나는 처음의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촬영 막바지에 얼굴이 벌개지고 목이 메었고, 진행자의 질문에 대답도 채 못 하고 그저 두눈에서 한없이 눈물만흘러내리면서 울고만 있었다.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방송에 앞서 담당 PD가 내게 누누이 강조했었다.


“사장님. 오늘 녹화에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시청자들이 부담 느껴 역효과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원고 내용도 다분히 위험합니다.”

어린 나이에 먼저 보낸 동생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카메라에 들이대는 큰 실수를 했고 그런데 컷 사인 한번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버렸었다.방송국 사정상 다시 촬영 하기도 힘들 것이었다. 눈물이 터져나오는 순간에도 나는한편으론 컷소리가 나오지 않아 걱정했다. 결국 불방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5. 방송의 울림

어쨋든 촬영이 끝났다. 스튜디오는 정적에 잠겼다. FD가 큐 사인을 내리고도 한동안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모두가 무언가에 붙잡힌 듯했다.

조명 감독과 사운드 엔지니어가 짧은 정적을 깨고 서로 쳐다보며 몇 마디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집에 아이도 아프다하면 출근길이 무거워지는데 할머니가 얼마나 힘이 …”

그래말이야. 방송하다가 이렇게 가슴 먹먹한 건 정말 오랜만이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실수 연발이었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기로했다.

이틀 뒤,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내 걱정과는 달리 특별 인터뷰는 거의 한 컷도 편집도 없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내 호소가 여과 없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