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환 화가의 카오스의 밀도와 블루의 압력

소설가 손병호의 그림이야기1.

by 손병호

— 노재환 《카오스 인 블루》 에 대하여

작가: 노재환

매체: 믹스드 미디어


〈카오스 인 블루〉는 색채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가 설명을 거부하는 순간, 그 파편들이 어떻게 화면 위에 남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카오스’는 혼란의 상태가 아니라 질서 이전의 상태, 혹은 질서가 무너진 이후의 잔해에 가깝다.


1. 색채: 블루의 단일성과 균열

작품을 지배하는 블루는 단순한 감정색이 아니다. 이 블루는 바다나 하늘의 서정이 아니라, 침잠과 압력의 색이다. 깊은 남청에서 탁한 청회색, 물이 빠진 연한 블루까지 이어지는 스펙트럼은 하나의 색 안에서 끊임없이 분열한다. 이는 단일한 정서가 아닌, 시간이 축적되며 변질된 감정의 층위를 연상시킨다.

특히 블루가 화면 곳곳에서 번지고, 멈추고, 다시 찢기는 과정은 통제된 붓질이라기보다 의도된 방임에 가깝다. 작가는 색을 ‘그린다’기보다 ‘흘려보낸다’.


2. 물질성과 판화적 사고

노재환의 대학원 전공이 판화라는 점은 이 작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화면에는 찍힘, 긁힘, 덮임, 벗김의 흔적이 공존한다. 이는 회화적 제스처 위에 판화적 사고가 중첩된 결과다.

특히 화면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듯한 십자형 구조와 반복된 레이어는 인쇄판의 압력, 혹은 매트릭스의 잔상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붓의 즉흥성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찍고, 말리고, 다시 덮는 시간의 누적이 분명히 존재한다.


3. 구성: 중심 없는 중심

〈카오스 인 블루〉에는 명확한 초점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시선은 계속해서 화면 중앙으로 끌려간다. 이는 전통적 구도에 의한 중심이 아니라, 물질의 밀도가 만들어내는 중심이다.

중앙부는 가장 어둡고, 가장 겹쳐 있으며, 가장 많은 흔적을 품고 있다. 주변부로 갈수록 색은 옅어지고, 여백은 숨을 튼다. 이 대비는 카오스를 무작위로 흩뿌리는 대신, 카오스가 응축되는 지점을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카오스는 우연이 아니라 태도다

이 작품에서 카오스는 즉흥이나 무책임한 난폭함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작업을 지속해 온 중견 작가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하지 않는 것의 경계를 정확히 알고 있기에, 작가는 일부를 과감히 내려놓는다.


그 결과 화면은 불안정하지만 붕괴하지 않는다. 혼란스럽지만 산만하지 않다. 이는 30여 년 전업 작가로서 축적된 거리감과 절제가 만들어낸 균형이다.


5. 지역성과 보편성

노재환은 부산과 경남지역의 갤러리를 무대로 작품활동을 꾸준히 하는 지역의 중견 화가이지만, 이 작품은 지역성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이라는 구체적 기반 위에서 보편적인 추상 언어를 구축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 블루는 특정 장소의 색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며 변질된 시간의 색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