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 들렀다.
누구나 기억 속에 지독하게 남아있는 동네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내 경우엔 인천 백운역이 그런 동네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백운에 살다가 이후에는 인천 서구로 이사를 갔고, 고등학교부터는 서산에서 기숙사 학교를 다녔다. 이후에는 대학교 앞, 졸업 후에는 친구들과 서울 한복판, 지금은 경기도 위쪽에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주거지를 꽤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그럼에도 언제나 내 기억 가장 깊숙이 남아있는 동네의 모습은 여기다.
어른 키만큼이나 낮은 시멘트 집들과 알록달록한 판자 지붕들, 항상 열려있는 친구네 파란색 철문, 집집마다 쌓여있는 과일 박스나 리어카, 작은 빌라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과일을 깎는 이모들.
오늘은 백운아트센터에 볼일이 있어 지도를 보다가 '아, 여기 10분만 걸어가면 옛날 살던 동네구나?' 싶어서 고민하다가 카메라를 챙겼다. 근처를 지날 일은 많았어도 선뜻 발걸음이 향하진 않았는데, 오늘은 일부러 두 시간쯤 일찍 도착했다.
사실 나는 유년기가 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아서 뭐 굳이 살던 동네를 들를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또 굳이 내키지 않을 이유가 뭔가?
그리고 (조금 여담이지만) 경기도로 오기 전에 잠깐 인천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마침 독서모임으로 다녔던 인천여성민우회의 사무실이 하필 백운역 근처에 있었다. 그때도 주소를 찍고 내렸다가 아는 길이라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이 들고 우연히 옛 동네에 왔으니 오며 가며 반가워 할 수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런 기분은 안 들었다. 나는 저 익숙한 골목들만 봐도 아주 우울해지는 것 같았으므로...
이후에도 몇 번 들를 기회는 있었지만, 그러고 나면 어딘가 묵직해진 기분을 혼자 견뎌야 할 것 같았다. 절대 마주하기 싫은 자기 연민과 별 유쾌하지 않았던 내 유년기 그 어딘가를 서성이는 나의 미숙함을 볼 것 같았달까.
하지만 오늘은 왠지 마음이 너그러웠다. 나는 꽤 자랐고, 그렇담 화해할 유년기의 동네 하나쯤 별 거 아니지. 그럼 화해하자. 오늘은 정말 반가운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도착하고 나니 한창 노을이 지는 시간이다. 골목 하나를 걸었는데 벌써 카메라로는 노출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 흑흑.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백운역과 백운아트센터의 사잇길,
아마도 철거 중인(?) 주택.
이 골목은 집에서 꽤 먼 곳인데, 엄마와 자주 걸어왔던 곳이다. 근처에 커다란 유통이 하나 있었는데, (옛날엔 마트를 유통이라고 불렀다) 거기서 파는 우유가 제일 저렴하다며 엄마가 꼭 여기로 와야 한다고 말해줬다. 지금은 이 골목 너머에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마을버스가 다니고 있어서 반가웠다. (지금은 양말가게로 바뀐) 정류장 앞 조그만 가게에서 엄마가 토큰을 사면, 내가 버스 토큰함에 토큰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은행놀이 지폐처럼 예쁘게 생긴 것도 있고 엽전처럼 생긴 토큰도 있었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엄마는 동생을 업고 우리는 항상 버스를 타고 동암역에서 내렸다.
나는 옛날 주택이 좋다.
옛날 주택의 좋은 부분은 정말 정말 많다. 대문 머리(?) 위에서 화분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좋고,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철제 계단도 좋고, 이렇게 각자 맘대로 생긴 난간(?)이나 담벼락 모양도 좋다. 벽돌이나 타일의 모양이 가지각색인 것도 좋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부러웠지만 주택에 사는 친구들이 더 부러웠다.
으 너무 예뻐요.
버스 정류장 근처 호프집.
언제 문을 닫았을까?
동네 치킨 호프집에 대한 로망도 좀 있다. 어렸을 땐 치킨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어서, 호프집이라고 쓰여있는 가게에서만 파는 음식인 줄 알았다. 그래서 동네 호프집을 지나갈 때면 그 치킨 튀기는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 향긋함.
어른들만 먹는 음식인 줄 알았는데, 좀 자란 다음에야 치킨을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라버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엔 그냥 튀긴 것도 아니고 양념을 해다가 숯불에 구웠다는 치킨도 한 번 먹어봤는데,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아빠가 사 왔던 첫 치킨은 전기통닭.
K 아빠의 전유물(?) 전기통닭이다. 우리 집 아빠는 통닭 한 마리를 사오면, 껍데기가 제일 맛있는 거라면서 다리부터 죽 뜯어 벗겨서 자기가 홀랑 다 먹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가 맛있다는 거 양보하느라 '난 먹어봐도 맛 없던데, 껍데기는 아빠 다 먹어라' 하면서 컸다.
그 인간은 뭘 먹든 항상 제일 맛있는 부분을 알고 있었고 그건 자기 혼자 다 먹는 사람이었다. 그래, 부모라고 자식에게 다 양보하란 법은 없다(?)
아마도 이 동네에서 제일 커다란 건물.
그 당시에는 엄청 으리으리하고 반짝거리는 호텔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안쪽 로비에 샹들리에가 있었고, 저 높이 보이는 연회장도 정말 대단해 보였다.
호텔이 뭘 하는 곳인가, 파티 같은 걸 하는 곳인가 보다- 생각했다. 어렸을 때 기억하는 정말 제일 큰 건물이다. 지금은 항공대학교? 건물로 쓰이는 것 같다. 그리고 항상 이 육교를 건너 집으로 내려갔다.
육교 아래.
내가 정말 놀라버렸다. 금수강산이 세 번쯤 바뀌었구나. 육교 아래는 누가 버스킹이라도 할 것 같은 깨끗한 광장으로 바뀌어 있었고, 새 건물도 많이 보였다. 이야.
항상 친구들하고는 육교 아래에서 헤어지거나 만났었는데, 아주 감회가 새로웠다.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 당시 매일 같이 놀던 한나와 약속 시간을 정해야 하는데 손목시계도 핸드폰도 없어서 그 시간에 딱 맞게 어떻게 만나지? 가 큰 고민이었다.
결국 하늘을 보고 노을이 질 때쯤이었나? 우리 딱 하늘이 이렇게 되면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어긋날까 봐 서로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냈다. 오래오래 기다리자고도 했지만 당연히(?) 우린 만나지 못했다 (ㅋㅋㅋㅋ)
저 김밥천국 자리에
땅콩과자를 팔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아주 새 건물이 들어섰다.
천 원인가 오백 원을 내면 땅콩과자 8개를 주셨다. 엄마랑 종종 사 먹어서 가끔 몇 개 더 주기도 하셨는데, 어느 날은 아저씨가 이제 장사를 접는다고 작별인사를 하셨다.
모르는 사람에게 들은 첫 번째 작별인사인가. 흑흑. 아들이 어쩌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날은 이제 못 본다고 과자를 더 많이 주셨다. 다시 못 보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인사로 땅콩 과자를 많이 받은 게 조금 더 좋았다.
아, 여기 오래된 집이었는데. 여긴 가게가 자주 바뀌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동네 빵집이 제일 오래 있었는데 피자빵이 500원이었다.
피자빵도 진짜 내 인생에 센세이션 한 테이스트의 세계를 열어줬다. 진짜 너무 맛있었는데, 아주 내향적이었던 나는 뭔가를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항상 입맛만 다셨다... 뭣보다 그땐 빵을 막 사 먹는 시절이 아니어서... 어린이 주제에 감히 사치재를 사 달라고 할 수가 없었지...
가끔 삼촌이 놀러 와서 뭐 먹고 싶냐고 하면 머릿속엔 빵빠레랑 피자빵밖에 없었는데, 항상 어른스러운 척하느라 전 괜찮다고만 했다. 심지어 그 어른스러움의 진실성을 증명하려고 세 번을 물어봐도, 네 번을 물어봐도 저는 정말 괜찮다고 대답했다.
결국 크면서 남은 건 이상한 울분뿐... 지금은 소세지빵 짱 좋아하고 빵집 가면 가격 안 보고 맘껏 사재 끼는 어른입니다.
이때부터 노출이 안 나와서
폰으로 찍었다.
저 철물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진짜 우리네가 나온다.
아이 반가워.
그럼 오늘은 이만 끝.
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끝
두번째 글도 써 두었으니
이어서 올릴게요. 찡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