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벨 에포크> 영화 리뷰
스포일러 있어요 :)
<카페 벨 에포크>
처음 개봉했을 땐 누구나 좋아할 만한 로맨스 영화겠거니, 유쾌한 프랑스 영화겠구나. 했다가 뒤통수 맞았다. 프랑스 영화가 작정하잖아? 최고다. 뭐, 작정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취향에 총 맞았다고 할 거다. 한 2년 동안은 재생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매 번 돈 내고 봤는데, 이제 왓챠에서 마음껏 볼 수 있다. 20년도에 개봉했고, 오래간만에 내 마음속 1위 갈아치운 로맨스 코미디. 얼마나 좋으면 2년이 지나서 이제야 글을 쓰겠어!
먼저 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좋은 시절이라는 의미로 프랑스의 가장 번성했던 19C 말 즈음을 일컫는 표현이다. 프랑스 외에도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보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가장 태평하고 아름다웠던 15년을 뜻한다.
당신의 벨 에포크는 언제인가요?
영화는 당신이 돌아가고 싶은 딱 하루가 있다면, 그게 언제인지 물으며 시작한다. 나의 가장 빛나는 시기. 내가 가장 사랑스러웠던 그때. 보통 그런 날들은 과거에 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예순이 넘은 만화가 빅토르는 과거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가족들이 모여 즐기는 파티에서, 언제로 가장 돌아가고 싶냐는 아들의 물음에 빅토르는 고집스럽게 “선사시대"라고 대답한다. 그는 새로운 세상의 문명을 향해 고약하게 구는, 전형적인 노인이다.
영상작업을 하는 빅토르의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요즘 콘텐츠'를 보여준다.
짧은 필름 콘텐츠는 흑인노예와 신분제가 당연했던 시대적 배경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혐오와 차별을 향한 전복적이고 풍자적인 메시지를 드러낸다. 빅토르는 영상 속에서 재현되는 인종차별에 불편감을 느끼지만 막상 영상의 결말로 완성되는 메시지를 완전하게 읽지는 못한다. 아들이 웃으며 "풍자하는 거예요." 말하자, 그제야 빅토르는 조금 안심하는 눈짓을 보인다.
반대로, 그의 아내 마리안은 현대에 놀랍도록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과 협업해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QnA 상담 사이트를 개설하고, 잠들기 전에는 수면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안경(?)을 사용한다. 빅토르가 고약하게 구는 현실을 마주하기 싫을 때에도, 마리안은 그 안경을 쓴다.
ㅡ 마리안이 마치 어딘가에 와 있는 것처럼 눈앞의 풍경을 바꿔주는 이 안경이 신기하지 않냐고 묻자, 빅토르는 책장을 넘기면 자동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며(?) 책으로 응수한다 ㅡ
둘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신문이 사라지면서 직업도 사라진 빅토르는 이대로 자신의 자리가 밀려날세라 끊임없이 현대의 문명에 혹평을 가한다. 인터넷도 기계도 모두 쓸모없다고. 하지만 정작 빅토르는 현대의 문명과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아내에게 기대어 산다. (카드도 아내 거다.)
빅토르는 새로운 세상의 자본과 기계 문명이 거짓되었음을, 자신의 아날로그한 기술력과 진실성이 빛을 발하기에 이 시대가 너무나 거짓의 시대임을 마리안도 동의해 주기를 바라지만, 마리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결국 온몸으로 시대에 저항하던 빅토르는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그는 아들의 초대장을 받아들여, 가장 떠나고 싶은 하루를 향한 여행을 시작한다. 이 여행은 아들의 오랜 친구 앙투안이 하는 '이벤트' 사업으로, 고객이 원하는 과거의 하루를 재현해 주는 서비스다.
과거의 하루는 어떻게 재현될까. 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이 장면에서 굉장히 짜릿함을 느낄 것 같다. 빅토르는 수많은 세트장을 지나 자신이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1974년 5월 16일로 걸어 들어간다. 수많은 스태프들과 조연들, 배우들, 조명, 사운드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빅토르의 기억으로 편집되고 재구성된, 1974년 5월 16일의 cafe la bella epoque. 하루 2만 달러 (한화 2700만 원)로 재현된 그날의 기억은 빅토르가 기대한 것보다 더욱더 아름답고, 진실되고, 머무르고 싶은 시간이 된다. 배우들은 감독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자신의 배역에 충실하고, 공간의 거울은 사실 감독이 있는 편집실과 마주 보고 있으며, 세트장의 천장에는 사람이 움직이는 조명이 있고. 그래서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고 했던가. 빅토르는 결국 아내와 공동명의로 가지고 있던 콘도도 팔아넘긴다.
그리고 1974년에 머무르기 위한 빅토르의 노력은 다시 그림을 그리는 일로 이어진다. 그는 연출된 1974년의 호텔을 작업실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의뢰를 받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사랑했던 것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빅토르가 사랑한 1974년을 보면서, 나는 내 추억을 떠올렸다. 사실은 철저하게 내 위주로 편집되었을 기억들, 기억에 공평이 어디 있나. 사실 나의 기억과 의미를 구성하는 그날의 그 배역들은 빅토르의 하루를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사실은 내 기억 바깥에서 다른 모습으로 숨 쉬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럼에도 과거에 잠기는 일이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현실에서는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이, 과거를 재현하는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구나, 그 때의 감정과 생각들은 그 곳에만 존재하는구나 싶을 때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영화에서는 공간도, 시간도, 작은 소품과 배역 하나도 모두가 허구로 이루어졌지만 그 합이 만들어내는 순간의 장면은 ㅡ심지어 빅토르가 느꼈을 감동을 생각하면ㅡ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마리안은 빅토르의 1974년으로 초대받는다. 첫 만남 때와 같이, 마리안은 빅토르의 기억 속 카페의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 어긋난 있던 그들의 모든 시공간이 만나는 하나의 순간이랄까. 어쩌면 모두가 기대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낭만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영화에서 처음으로 가감 없이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담담하게 오가는 사랑이 깊은 대사들을 들으면서, 아무래도 기억이 추억이 되는 건 함께 추억할 사람이 남아있다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어쩌면 그다음 시대 까지도.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반짝반짝한 일이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한 시절은 어떻게 기억될까. 지나온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도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버리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