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함과 성스러움의 사이
향일암은 여수 남쪽 끝에 있다.
이른 새벽 남해 보리암에 올랐던 우리는 비구름과 안개를 탓하며 여전히 사람들 발길이 시작되지 않은 이른 아침길을 돌려 여수로 향했다. (이전글 : 보리암 가는 길 https://brunch.co.kr/@sohon/77)
남해와 여수를 지도에서 보면 바닷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여수 엑스포 때 잠시 개통되었던 바닷길이 끊기면서 이제는 육지길로만 갈 수 있다. 덕분에 바다로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을 길이 돌고 돌아 2시간가량이 걸린다. 남해에서 여수까지 가는 동안 노량대교, 섬진대교, 이순신대교, 묘도대교 등 섬을 잇는 큰 다리 여러 개를 건너면서 하동, 광양을 지나 여수에 들어섰다.
향일암에 가기 전 시원한 커피 먼저 한잔 하려고 카페에 들렀는데, 카페 규모가 입이 떡 벌어지게 한다. 여수 돌산공원 앞에 있는 돌산스타벅스인데 여태 다녔던 지점 중에 가장 큰 규모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여행 온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카페 2층 밖으론 돌산대교와 바다가 그대로 보이는 뷰인데, 봄가을에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 곳이었다.
카페에서 잠을 깨우고 향일암으로 향했다. 향일암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12년 전 처음 왔을 때는 아이들과 놀러 왔던 것이라 향일암도 관광지로 방문했다. 그때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너무 추워서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시장에 들러 아이들의 목도리를 사러 다닌 것과 무한게장집과 통장어탕집을 갔었던 것들이다. 향일암에 대해서는 거북돌이 쌓여있던 것,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 찍었던 것, 향일암 뒤편 어딘가 대나무숲을 산책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아내와 둘이 순례길처럼 다니며 예전 일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보리암이나 구인사 입구의 한적함을 경험한 우리는,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향일암 입구의 번잡스러움에 조금 당황했다. 여수 초입부터 보이기 시작한 갓김치 판매점들이 향일암에 도착하자 절 입구 양옆으로 늘어서 호객을 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향일암에 오르고 나서였다. 향일암 기도처 곳곳에서 보살님들이 소원 비는 초를 놓으라거나 기와불사를 하라거나, 불교 기념품을 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졸라댔다. 여러 곳의 절을 다녔지만, 이처럼 심하게 불사(?)를 종용하는 곳은 처음이라 차츰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해수관음상 앞에서 초를 이미 밝혔다는 말에, 그쪽하고 이쪽은 다르다며 곳곳에 초를 밝혀야 한다는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 뒤에서 중얼거리는 사람의 태도에 기분은 더욱 나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사찰 순례길이라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향일암 기도처 곳곳에서 기도하려니 온몸에 땀이 흘렀다. 특히, 향일암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까지 멀쩡했던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내려올 때까지 비가 오락가락했다. 범종 옆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다가 비가 잠시 긋는 짬을 노려 내려오길 재촉했다.
향일암에서 기도를 마친 우리는 얼른 점심을 먹고 집으로 달리기로 했다. 향일암의 남다른 분위기에 조금 나빠졌던 기분도, 향일암까지 모두 돌아봤다는 뿌듯한 기분에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지난 4월 답답한 마음에 아내에게 툭 던진 '절에 가서 기도할까?'라는 한마디로 시작된 사찰 순례가 4대 해수관음상까지 찾아가 기도하자로 발전해 양양 낙산사, 석모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 사이 홍제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단양 구인사까지 다녔으니 꽤 열심히 찾아다닌 셈이다. 멀리까지 못 가는 토요일에는 매번 홍제동 옥천암을 찾았으니 우리더러 '열렬한 불교 신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런데 신자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모든 것을 듣고 보며 살펴주신다고 하시니 말이다.
향일암에서 나와 인터넷을 뒤져 통장어탕을 잘한다는 상아식당이라는 곳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아뿔싸!! 가서 보니 12년 전에 아이들과 왔던 곳이었다. '메뉴는 똑같은 거 같은데, 전에 먹던 곳은 바닥에 털썩 앉아 먹는 곳이었어. 여긴 아니네'라는 말을 일하시는 분이 듣고는 '맞아요. 저희 예전에는 바닥에 앉아 먹는 곳이었는데 몇 년 전에 이렇게 바꿨어요'하고는 카운터에 있는 주인한테 '12년 전에 아이들이랑 오셨던 분이래요. 우리 털썩 앉아먹던 것도 기억하시네'라고 한다. 기억이라는 건 가끔 이상하게 살아나곤 한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니 '단순하게도'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상아식당을 나와 '다 큰' 아이들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서 고속도로를 탔다. 순천완주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논산천안간 도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는 동안 휴게소에서 두 번 쉬고 집까지 오니 일곱 시가 넘어 있었다.
늦은 저녁 후에 아내와 맥주 한잔을 마시고 나니 비로소 집에 온 거 같다. 이틀 동안 열다섯 시간 이상 운전을 하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움직인 것 등이 아주 오래 집을 비우고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오래전 버킷리스트 중에 '친구들이랑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라는 걸 적어둔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녀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니어도 해수관음상 찾아다니기, 바다뷰 카페 찾아다니기 등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의미를 담아 다닐 수 있다면 의미 있는 기행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 한잔을 마시고 나니 나른해진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기 시작해 쉽게 잠이 들었다. 밤새 꿈 한번 꾸지 않고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늘 깨던 아침 시간이었다. 샤워하고 출근해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