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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Aug 11. 2019

어젯밤 꿈을 기억하시나요

여덟 번째 한 글자 주제, 꿈


 

평일에 나는 보통 7시 30분쯤 일어난다. 그러나 내 핸드폰에 설정된 알람은, 6시 30분부터 울리기 시작한다.


일어나기 한 시간 전으로 알람을 설정해놓는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그게 이미 습관이 되어 한 번의 알람으로는 절대 제시간에 눈을 뜨지 못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6시 반부터 7시 반까지의 그 시간, 잠들만하면 울려대는 알람을 손만 더듬거려 꺼가면서 가물가물 누워있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한 시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이루어진다. 나는 오늘 일정에 대해 생각하고, 날씨가 괜찮은지 궁금해하며, 대충 옷차림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아침을 먹을지 안 먹을지를 결정한다. 명징한 정신상태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고 반쯤 잠든 채로 생각의 줄기를 더듬는 일이다. 따라서 딱히 대단한 일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항상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7시 반이 다 되어 번쩍 깨어나는 날이면 침대를 떠나는 것이 영 아쉽기만 하다. 뭔가 찝찝한 느낌이 남아 계속 다시 베개로 얼굴을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찝찝함은 아마도, 방금 전까지 꾸던 꿈을 모두 잊었다는 데서 온다.


그렇다. 내가 그 새벽에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고 가장 많이, 열심히 하는 일은 방금 전까지 꾸던 꿈을 복기하는 것이다. 그 순간,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순간에 꿈을 붙잡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강렬했든 간에 꿈은 금방 휘발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무언가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기억나지 않는 감각은 내겐 꽤나 불쾌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꾼 꿈이라도 붙잡아보려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는다. 물론 그래 봐야 마지막에 꾼 꿈의 일부만 기억할 수 있을 뿐, 그 이전에 분명 거기 있었던 꿈들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꿈을 많이 꾼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요즘에 들어서는 그건 그냥 관심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건강한 성인들은 매일 밤 거의 모든 수면 단계에서 수 개의 꿈을 꾼다고 한다. 다만 깨어난 뒤 그중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뿐. 나는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덕분에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꿈을 기억하는 빈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꽤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꿈을 더듬어보며 그 의미를 궁금해하는 아이였다. 심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아마 꿈 때문이었을 터다. 나쁜 꿈에는 전부 좋은 의미가 있다고 사람을 위로하는 토속적인 꿈 해석을 믿기엔 나는 너무 의심이 많았고, 뇌의 전류가 일으키는 무의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라고 믿기엔 내 꿈은 늘 내 삶과 관련이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무의식과 꿈의 대가로 알려진 프로이트조차도 내 꿈을 '해석'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고. (아니 선생님은 무슨 꿈이든 전부 다 억압된 성적 충동의 표현이라고 하시니까...) 여전히 하나의 명쾌한 답까지 찾아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요즈음의 나는 심리학과 뇌과학이라는 방대한 학문의 중간 어디쯤에서 내 꿈을 이해하고 있다.







꿈은 현실과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꿈을 이해하려는 연구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꿈을 꿀 때의 뇌 활동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될수록, 더 이상 꿈을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상에서 우리는 꿈과 같은 비약적인 상상을 몇 시간씩 이어가지는 않지만, 이는 우리가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외부세계를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 두 시의 지루한 회의실을 떠올려보자. 심각한 주제를 두고 토의하던 중에도 잠깐의 틈만 있다면 머릿속의 생각은 완전히 마음대로 부유하기 시작한다. 나는 뜬금없이 어제 먹었던 피자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 생각이 어릴 적 잃어버렸던 토끼 인형으로 이어졌다가, 다음 순간 내일의 약속을 상기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내 귀에 끊임없이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고, 내 눈이 회의자료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내 의식이 정신 차리고 회의에 집중하라고 다시 방향키를 잡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갑자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묻기라도 하면 나는 그 순간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다. 방금 전에 내가 토끼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인지조차 못한 채로.


말하자면 꿈은 감각의 끊임없는 일깨움 없이 이런 상상력이 무한히 지속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이 나를 깨우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떤 이야기든 끝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 또 비판적이고 장기적인 사고를 하는 뇌의 영역도 같이 잠이 들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개연성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다는 건 깨고 나서만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꿈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매우 당연하고 논리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방금 전까지 눈 앞에 없던 사람이 튀어나와 말을 걸어도, 강아지가 두 발로 뛰어가다가 내게 전화기를 빌려줘도. 꿈속에서는 나의 모든 발상이 그대로 현실이 된다. 낮 동안에 가능성과 현실성을 엄밀히 따져대던 뇌의 일부는 깊이 잠에 들어서, 더 이상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아주 가끔 내 상식과 꿈이 충돌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지?' 하는 의아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애초에 꿈속에서는 그런 모순을 발견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그런 의문을 파고들다가 이게 꿈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꿈은 이른바 '자각몽'이 된다.)





꿈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논리적인 상상으로 가득 찬 꿈이 매일 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동안 널리 알려진 대로 꿈은 과거의 기억을 정리하기도 하고, 특히 그 과정에서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여러 방식으로 치유하기도 하며, 무의식적으로 내 행동습관을 강화시키거나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 기능과 역할이 매우 다양한 데다 여전히 대부분의 경로는 어둠 속에 묻혀 있어서 시작과 끝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꿈을 '해석'하려고 한다. 꿈 해석의 방법은 시대마다, 또 나라마다 매우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수수께끼 같은 꿈을 한 줄 한 줄 번역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꿈에 나오는 각각의 대상이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며, 어떤 특정한 줄거리로 이루어진 꿈은 또 그 나름대로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식이다. 결국 프로이트가 시도했던 것도 과학적인 꿈의 해석이었으며, 우리나라에도 토속적이고 독특한 꿈 해석의 문화가 있다. (돼지가 나오는 꿈을 꾸면 일단 복권을 사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왜 꿈을 꾸는지 공부할수록 내가 제일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 꿈을 해석하려 드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모두 각 요소로 분해되어 뇌 곳곳에 저장되고, 이 모든 요소가 꿈의 재료가 된다. 또 꿈은 어떤 높은 분의 계시처럼 눈 앞에 펼쳐지기보다 내가 직접 이끌어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꿈속에서 나는 분명히 자아를 가지고 행동하며, 이야기의 방향성은 보통 그즈음 내가 강하게 느끼는 마음속 깊은 곳의 감정을 기반으로 결정된다. 꿈이 결국 내 기억과 감정과 생각의 조합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단순히 장면 하나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추적하는 건 무의미하다. 비판적인 뇌가 작동하지 않아 이야기가 종종 개연성 없이 통통 튄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굳이 어떤 틀을 정해놓고 내가 꾼 꿈을 조각내어 이리저리 맞춰 넣을 필요는 없다. 물론 나도 의미 없는 꿈은 없다고 믿지만 중요한 것은 각 장면의 사소한 디테일보다는 내가 '체험'한 꿈 전체다. 그렇기에 오히려 요즘 나는 꿈에서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집중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바로 어제는 계속해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하는 꿈을 꿨다. 나는 이미 같은 수업을 몇 시간째 반복한 상태라, 목이 완전히 쉬어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목이 아플 지경이었는데, 내 앞에 바글바글 모여 앉은 아이들은 도통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그 와중에 교실 뒤에는 누구인지 몰라도 굉장히 평가자 같은 사람이, 은테 안경 같은 것을 쓰고 비판적인 얼굴을 하고 앉아 자꾸 뭔가를 기록했다. 나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과 교실 뒤의 그 평가자를 번갈아보며 계속해서 초조해졌다. 그럴수록 목소리는 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계속 목을 긁어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세상에, 정말 초조했다.


예전 같으면 이 꿈을 붙들고 한참을 고민했을 것이다. 무언가 마음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꿈은 매우 흔하지만 그것이 '수업'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건 처음이니까. 그 아이들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지,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사람은 누구를 상징하는 건지, 교단에 올려져 있던 꽃은 무슨 의미일까, 혹은 내가 무의식 중에 교단에 서고 싶다는 열망이라도 있었나 싶기도 했을 거고. 그러나 요즘은 그냥 꿈을 마치 하나의 체험처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과 그로 인한 초조함은 언제든 내 마음에 있는 거지만, 혹시 요즘에 그런 감정이 강해질 만한 사건이 있었나 잠깐 떠올려보면서. 혹은 목이 쉰 듯한 느낌이 어쩜 그렇게 생생했는지 신기해하면서. 가끔은 겨우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감정을 알게 될 때도 있고, 미래의 일을 시뮬레이션해 본 덕에 현실이 좀 더 가벼워질 때도 있고.






평소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잠에서 깨기 전 마지막에 꾸던 꿈 하나 정도를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다. 디테일은 사라지고 줄거리만 남는 일이 허다하지만 어차피 그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중요한 건 아니니 아무래도 좋다. 암호를 풀어 어떤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겠다는 욕심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꿈을 한 번 받아들여보자. 꿈의 이야기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겠지만 그건 그냥 내 의식이 낮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고, 영 어색하게 느껴지더라도 그건 여전히 '내가' 경험하는 일이다. 일상이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 그냥 놓쳐버렸을지도 모르는 깊은 감정이나 넓은 상상력을 어쩌면 꿈의 한 길목에서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실 무슨 의미가 있든 다 떠나서, 어떠한 감시감독도 없이 내 멋대로 상상해서 구성한 스토리에 심지어 내가 전지전능한 주인공이 되는 체험이다. 아마 그냥 가만히 눈 감고 누워서 천천히 기억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을 거라고.







+) 꿈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더 궁금하다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794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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