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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Aug 11. 2019

그럴싸한 꿈에 대한 강박

여덟 번째 한 글자 주제, 꿈

“뭐가 되고 싶니? 나중에 어떤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어떤 일 하고 싶어?”


꿈. 장래희망. 좌우명.
어렸을 적부터 참 많이 대답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그 많은 대답을 하면서도 확신을 가진 적은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의 나는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미술학원에 다닐 때는 미술 선생님이, 수영을 배우러 다닐 때는 수영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니까. 한때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하고 싶었고 (엄마는 네 방이나 치우고 그런 이야기 하라고 했지만) 전시회를 즐겨보기 시작할 때쯤엔 큐레이터가 하고 싶었다. 외국어에 흥미를 붙였을 땐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나는 크게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니, 뭘 하더라도 아무래도 어지간히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단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찬 채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핍과 불안함이 있었다. 온 세상이 내게 뭘 하고 싶냐 묻는데, 마치 나만 그런 게 없는 것 같았다.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답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한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뚜렷하게 좋아하는 게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걸 직업으로 가졌을 때의 벌이가 어떠하든, 밥은 먹고 산다면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반대로, 그런 게 없는 나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뭐라도 선택해야 할 텐데, 좋아하는 게 딱히 없으니 그 기준을 내 안에서 찾는 건 영영 불가능해 보였다. 수많은 갈래로 나뉘는 경영학을 전공하면서도 누군가는 전략, 누구는 마케팅, 누구는 회계나 재무를 하겠다는데 도무지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모든 세부 전공과목을 조금씩 들으며 전공 이수학점을 채워 졸업해버렸다.


내가 아주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대학교 시절 동아리는 1년 간 함께해야 하는 커리큘럼 아닌 커리큘럼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한 학기가 끝나는 마지막 모임 때, 서로의 꿈을 공유하는 “드림 세션”이라는 걸 했다. 나의 꿈이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그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때로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각도의 시야를 틔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그 직업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점을 짚어주기도 한다.

첫 번째 학기에서 내가 가져간 꿈은 ‘해외에 많이 나갈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공항을 매우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천공항이겠다. 높은 천장, 깨끗하게 들어오는 자연광, 쾌적한 공기, 여러 사람이 바쁘게 오고 가지만 정돈된 분위기. 그 모든 걸 나는 ‘공항 냄새’라고 불렀다.

두 번째 학기에서 내가 가져간 꿈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뭔가 지쳐있었고,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고들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서 불안감이 높은 때였다. 그냥 내가 원하는 건 행복하게 사는 건데, 행복이란 뭘까,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건 뭘까 한참을 고민했다. 뭘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며칠밤을 내리 고민했지만 답이 안 나왔다. 그래서 그 학기의 드림 세션에서의 기억은, 내가 말을 하다 말고 왈칵, 눈물을 쏟아버린 것이었다. 나는 뭐가 그렇게 불안했던 걸까.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니 어찌 보면 사소하면서도 나를 울게 만들었으니 내게는 아주 날카로운 조각이었을 테다. 꿈이라는 건, 행복하게 산다는 건.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나에겐 일종의 강박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바로 ‘나만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이렇다 할 목표도 욕심도 취미도 없던 내가 불안해하던 와중 마음을 고쳐먹은 건, 어떻게 사람들이 다 똑같이 멋있게 사나. 내 나름대로의 멋을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그 정의를 약간 삐뚜룸하게 했던 거다. 남들과 같아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생겨버린 거다. 어렸을 적 따돌림당할 때 아이들의 “따라 하지 마”라는 말이 트라우마를 만든 것일지, 혹은 개성을 강요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인지,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고 독특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고, 고로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이상한 사고 고리에 빠져버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남들이 좋다더라 하는 것에 딱히 끌리지는 않으면서,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스스로에게 불안감과 자아 도취감(?)을 동시에 느끼고, 그러면서도 내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감이 안와 너무 힘든 상태. 그리고 그게 취업과 맞물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과 합쳐지면서 아주 강력하게 작용했다.

이렇게 불안감이 가득한 시간이 몇 년째 계속되어, 요새는 스스로를 다시 살펴보려 노력 중이다. 기질 검사도 새로 해보고, 업무 성격 검사도 해봤다. 결과가 사실 내 맘에 들지는 않았다. 야망 있고 똑 부러지며 독립적인, 그리고 도전정신이 강한 여성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딱히 야망이 중요시하지 않는 기질을 타고났다. 사람에게도 매우 의존적인 편이다. 위험회피형 기질도 강했다. 풀이 죽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그래도 대충의 실루엣으로는 있었는데 기질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그렇게 타고났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해석도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을 많이 하는 편이라, 내가 그리던 실루엣이 실제로는 내가 그리던 게 아닐 수도 있다는 해석.

김예지 작가의 [저 청소일 하는데요?]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108p. 저 청소일하는데요? 중.
“꿈은 단순한 이상과 희망일 뿐. 원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생계를 담당한다든지 안정을 담당하고 있는 직업이라도 가치 있는 노동이란 건 변함이 없다. 꿈의 카테고리 안에 작은 부분일 뿐, 다른 부분들로도 꿈은 충분히 채워질 수 있다.”
112p. 저 청소일하는데요? 중.


“여러 요소가 들어간 꿈은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나? 누군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나? 그것을 잘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무엇’이 되겠다는 꿈, ‘어떻게’ 살겠다는 꿈. 뚜렷하게 그리고 있지 못해 매우 불안했지만, 어쩌면 내 것이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나는 꿈을 그리면서 싫은 걸 쳐내는 건 그럭저럭 잘 해왔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걸 무작정(?) 추구하기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뚜렷한 이유나 이득이 보이지 않는데도 결정을 내려도 되는지 불안했다.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내가 모르고 넘어갈까 초조했다. 그 좋다는 길이 나한테도 좋을지는 모르면서 항상 그랬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러더라.


좋아하는 것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지만, 싫어하는 것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고.

이제는 조금 더 내 꿈을 그리기 위해 이유 없이도 좋은 요소를 넣어봐도 되지 않을까. 꿈은 말마따나 이상과 희망이니까, 조금 더 신나게 꾸어봐도 되지 않을까. 그만 불안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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