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한 글자 주제, 밥
“얘는 어떻게 지 고모를 이렇게 빼다 박았어?”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를 아주 다양한 사람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들었다. 작고 오래된 동네였고,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마 우리 고모의 어릴 적 모습도 또렷이 기억하시는 것 같았다. 엄마 손에 끌려 시장이며 놀이터며 돌아다니다 보면 꼭 하루에 한 번씩은 이 소리를 들었다. 아니 물론 엄마도 닮고 아빠도 닮은 것 같긴 한데, 누가 뭐래도 너는 네 고모를 제일 닮았다고. 심지어 나중에는 고모 스스로도 내 어릴 적 모습과 닮은 것 같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나로서는 뭐 진실을 알 수 없는 문제였지만.
그래서인지 몰라도 고모는 나를 유난히 예뻐했고, 나는 고모를 꽤나 좋아했다. 어떤 게 먼저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고모가 아껴준 것이 먼저였지 싶다. 어린애들은 원래 그런 감정에 민감하고, 나는 늘 예쁨 받고 싶어 하는 아이였으니까. 하여간 분명 친가보다는 외가 쪽이 더 편했고 이모에게 반말을 하면서도 고모에겐 존댓말을 했을 정도로 거리감이 달랐는데도 나는 고모를 더 따랐다. 아들 하나밖에 없는 고모는 나를 딸처럼 데리고 다녔다. 물론 가까이 산 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당시 우리는 이태원의 한 3층 집에 같이 살았다. 할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주택이었고, 1층엔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2층엔 작은 아빠네 가족이, 3층에는 큰 고모가 살았다. 내부로 연결된 구조는 아니어서 층마다 독립적인 공간이었지만 하여간 대문을 나서 2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나는 뻔질나게 고모네를 드나들었다. 중학교 도덕 선생님이었던 고모의 퇴근 시간은 내 하교 시간보다 두어 시간이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3층으로 뛰어가기 일쑤였다. 올라가서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늘 고모의 시어머니, 나와는 어색한 사이인 할머니만 집에 계시곤 했다. 잘 모르는 어른이랑 남의 집에 있는 꼴이었는데도 나는 그 집이 좋았다. 할머니에게 인사만 꾸벅하고 다다다 들어가면 안방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만화 비디오가 올려져 있었고, 나는 고모가 올 때까지 ‘두치와 뿌꾸’나 ‘바우와우’ 같은 만화를 여러 번 돌려보며 안방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버릇도 없다. 고모만 쓰는 방도 아니고 고모와 고모부가 주무시는 안방에, 매번 맘대로 들어가 휘저어 놓는 꼴이었으니.)
정확히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는 모른다. 그냥 고모의 방에서 나는 향기가 좋았고, 옷방에 가득한 어른 옷이나 처음 보는 화장품이 신기했고,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내 맘대로 만화를 볼 수 있다는 건 더더욱 좋았다. 그러니까 3층의 고모집은 내가 처음으로 가진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열 살짜리 어린애가 가질 수 있는 아지트 중엔 아마 가장 좋았을 거다. 침대 위에서 만화를 보는 게 지겨워지면 거실로 나와 가죽 소파 위에 늘어져있거나, 소파 등받이 뒤로 넘어가 벽면을 꽉 채운 책장을 구경하고, 어려운 책 제목들을 곰곰이 뜯어보고, 그러다가 아무데서나 잠이 들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계셔서 항상 TV 소리도 크게 틀기 어려웠던 집보다는 아무래도 그곳에서 마음이 더 편했던 모양이다. 입이 심심하면 고모가 나를 위해 사다둔 과자를 조금씩 까먹기도 했지만 나는 그 집에 가면 유난히 군것질을 하지 않았다. 곧 고모가 돌아올 테고, 나는 과자보다는 고모의 까만 밥이 먹고 싶었으니까.
고모가 해주는 까만 밥, 그러니까 흑미밥을 나는 너무나도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고모는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나를 먼저 붙잡고 한참 반겨주고, 습관처럼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서 저녁을 먹여서 내려보내겠다는 통보 전화였는데, 엄마의 반응은 보통 그러지 말고 그냥 내려보내시라는 만류였으므로 항상 전화통화가 다 끝나기 전까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고모가 이겼고 나는 고모네서 고모와 고모부와 사촌오빠와 고모의 시어머니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고모네 밥은 항상 흑미밥이었다. 왜인지 몰라도 단내가 나는, 처음 본 내가 ‘고모 왜 이 밥은 까매요?’하고 물었던, 여전히 그 찰기가 마음에 선한 것만 같은 흑미밥. 왜 흰쌀밥을 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고모는 그냥 흑미밥이 더 좋다고 했고 그 뒤로는 나도 흑미밥을 좋아했다. 어린애 입맛에 뭐가 그리 달랐을까 싶지만 고모네서 먹는 밥 한 끼는 항상 꿀맛이었다. 생각해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식사자리일 법도 한데, 아마 항상 내 입맛에 맞춰 두어 가지 반찬을 더 준비해준 고모 덕이었지 싶다.
당시 엄마는 직장을 다니면서 투병 중인 할아버지를 모시느라 매일 정신이 없었고, 우리 집의 식사는 무조건 할아버지의 입맛에 맞춰 차려졌다. 영 먹고 싶지 않던 잡곡밥과 콩밥, 어린 나는 손도 대지 않던 나물들. 맛이 없노라고 엄마에게 투정 부릴 만큼 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저 어린애였던지라, 고모가 나를 위해 특별히 놓아주는 소시지와 햄, 예쁘게 모양을 낸 계란말이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흑미밥이 그렇게 맛있었을까. 나는 틈만 나면 고모에게 나도 까만 밥이 너무 좋다고 웃었고 고모도 마주 웃어주었다. 가끔 고모도 내 편식을 고치기 위해 야채나 콩 같은 것을 밥 위에 올려주었지만 나는 그 집에선 뭐든 맛있게 먹었다. 고모가 좋았고, 고모가 해주는 밥이, 나를 위해서 따로 준비해주는 반찬이나 후식이, 거기 담겨있는 오롯한 애정이 좋았으니까.
그 모든 것이 내게는 흑미밥 한 공기로 남았다.
고모는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쯤 지병으로 인해 공기가 좋은 곳으로 요양을 떠나셨고,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 결국 돌아가셨다. 마지막까지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고모가 해준 밥을 다시 먹을 수는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가끔 엄마에게 흑미밥을 해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그 밥 한 공기로 결코 모든 것을 돌려놓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흑미밥에서는 유난히 단내가 난다. 그럴듯한 밥상을 내가 직접 차려낼 수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조건도 없이 그저 받기만 했던 사랑과 애정이 여전히 거기 담겨있는 것만 같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날의 나와 그런 나를 언제나 안아주던 고모와, 뭐가 되었든 끝내 다 돌려주지 못한 것들이 그득 남아 유난히 꼭꼭 씹어먹게 되는 밥.
따뜻한 흑미밥에 담긴 애정이 여전히 내 일부를 지탱하고 있다.
아마도,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