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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Oct 05. 2019

반려견과의 이별이 다가온대도,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순이는 올해로 13살이 되었다. 애기 때부터 직접 키워온 것이 아니므로 정확한 날짜를 헤아리진 못하지만, 최대한 낮게 잡아봐도 이미 열세 살. 어림잡아 사람 나이로 환산해보면 거의 아흔 살. 아무리 반려견들의 평균수명이 늘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게 남았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이 친구와의 이별을 떠올릴 때가 늘었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도 다섯 번이나 거쳤던 터라 이미 여러 번 마지막을 상상했었지만... 갈수록 그 상상 속의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느낌. 기실 아무리 건강한 강아지라고 해도, 이 여리고 작은 생명체들의 죽음은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건강하게 천수를 다 누린다고 해도 기껏 이십 해를 겨우 넘기는 정도. 반려동물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보다 짧다. 반려인이라면 아마 모두들, 언젠가 이들과 이별하게 될 거란 사실이 마음속 어딘가 보기 싫은 낙서처럼 쓰여있을 것이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도 짧을진대,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강아지가 그 수명을 온전히 다 누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 부분이 요즘 나를 힘들게 한다. 매일의 일상 사이에 촘촘히, 순이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 문제없을 것 같던 하루가 어떤 식으로 강아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수백 가지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썼다 지운다. 물론 나의 죽음도 마찬가지라 언제 어디서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죽음을 잘 상상하지 못하니까. 주변에서 수많은 예외를 보고 나서도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곤 하니까.


그에 비해 강아지의 죽음은 너무 상상하기 쉽다. 실제로 순이는 사과를 먹다가 조각 하나가 목에 걸려 그대로 숨이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한 차례 수술을 하게 만들었던 유선종양이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고, 그 외에 또 다른 어떤 병이 이 늙은 강아지를 습격할 지도, 강아지는 절대 아프단 소릴 하지 않으니 내가 제때 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신마취를 또 해야 할지도, 그 과정에서 나는 강아지가 잘못돼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명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실제로 노령견은 마취에서 영영 못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순이는 그새 부쩍 긴 털을 자르고 왔는데, 나는 미용을 기다리는 그 두 시간 동안도 무수히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억눌러야만 했다. 사람이 미용실에 갔다가 갑자기 죽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강아지에게는 있을 법도 한 일이다. 무슨 사고가 있을 수도 있고, 원래 아프던 뒷다리가 미용 중에 무리를 해서 다시 무너질 수도, 그러면 다시 이야기는 수술로 이어지고...


그렇다. 나는 원래도 나쁜 일에 유난히 상상력이 좋은 편이다. 종종 그것을 이용해서 시뮬레이션을 해오기도 했었다. 실제로 어떤 일들은, 미리 최악의 결과를 여러 번 생각하다 보면 나름 그 일에 대한 감정적 대비도 되고 마음도 조금 편안해진다. 그러나 그 전략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강아지의 죽음도 그중 하나라, 아무리 상상을 덧붙여도 그 상상을 대하는 나의 감정이 조금도 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머릿속에서 끔찍할 정도로 부풀려져 현실을 좀먹고 가끔은 상상만으로도 나를 울게 한다. 강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혹시 그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괜한 상상을 하며 눈물짓는 사람이라니. 순이가 내 안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어느새 이만큼이나 커져버렸다. 상상만으로도 울어버리는 나인데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은 그 생각 자체가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혼자 주저앉아 쩔쩔매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붙들게 된 건 새로운 시야를 깨닫게 된 이후다. 독서모임을 계기로 <나의 반려동물도 나처럼 행복할까>라는 책을 한 권 접했다. 티베트 불교의 시각으로 반려동물과 반려동물을 대하는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여러 방면에서 내 시야를 조금 넓혀주었다. 인상 깊었던 많은 것들을 제쳐두고 일단은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실제로 책을 읽을 때도 나는 9장 ‘반려동물의 마지막 여행: 죽음 그리고 그 후’를 읽기 위해 급하게 앞 장들을 넘겼었다.) 책에서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해 주는 조언은 딱 한 줄로 정리된다:



나의 슬픔보다 반려동물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반려동물이 정말로 의식을 갖고 있고 그 마음이 이 생의 경험에서 다음 생의 경험으로 옮겨갈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반려동물의 생각과 감정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살아가겠지만 그들은 이제 곧 죽을 것이다. 긍정적인 영향을 줄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그 영향력 말이다. 이 시기에 전전긍긍하거나 울기만 한다면 우리 반려동물에게 해롭기만 할 것이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어느 정도 알든 모르든 우리가 가능한 한 침착하게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이 반려동물에게는 가장 좋다. 우리 감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반려동물이 좀 더 평화롭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을까에 집중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죽은 모든 생명체가 다시 태어날 기회를 얻으며 이번 생에서의 인연과 경험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이 부분에서 분명 깨닫는 게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과 살고 있다면 우리가 서로 감정적 영향력을 얼마나 주고받고 있는지, 굳이 종교적 차원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모두 진하게 느끼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내 작은 강아지는 내가 우는 것을 보면 어쩔 줄 모르고 내 주위를 맴돈다. 살며시 엉덩이를 붙이고 온기를 나눠주려고도 하고, 내 품으로 기어들어와 얼굴을 핥아주기도 한다. 위로의 행동이지만 그러는 내내 같이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그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이란. 실제로 순이는 그동안 여러 번 아팠고 그럴 때마다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붕대를 감은 뒷다리를 절뚝이며 내 울음을 달래주겠다고 다가오는 모습에 아픈데 왜 움직이냐며 더 펑펑 울어버린 적도 있다.

 


그런 강아지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와중에 내가 내내 울고 있다면?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이 과정을 순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슬프고 아플 것만을 걱정했지,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 내 어린 강아지가 또 한 번 상처를 받을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게 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빠져들기 쉬운데 이것이 우리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 이 아름다운 존재를 잃게 되어서 나는 지금 화가 난다. 그가 사라져 버려서 나는 지금 너무도 외롭고 슬프다. 우리 사이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하지만 고통스러운 이 모든 생각에는 늘 ‘나’라는 요소가 들어가 있다. 우리 생각의 초점을 반려동물에 맞추는 연습을 하고 그런 습관을 들일 때 더 이상  ‘나’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다른 누군가의 안녕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은 저절로 하지 않게 된다. 초점의 이런 실질적은 전환이 우리를 덜 괴롭게 한다."



책에서는 불교의 교리나 명상법을 빌려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평화롭게 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도 일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따르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보다 내 반려동물의 평안을 앞세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데 있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보다 명확해진다. 물론 다짐한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딱 그만큼 어리석어서, 벼랑 끝에 몰리는 순간 다른 무엇보다 본인의 감정을 우선시하곤 하니까.


그러나 나는 책에서 발췌한 여러 교훈대로 최선을 다해 그 전환을 평화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는 순이와 내가 같이 겪어야만 하는 일이기에, 그게 언제가 되어도 두렵지 않도록 지금부터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연습을 할 것이다. 그 마지막 순간에 적어도 후회까지 느껴지지는 않도록 순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리고 그 끝에, 결국 그 마지막 순간이 온대도, 벌벌 떨며 울기보단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순이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어야지. 내가 울면 이유도 모르고 따라 슬퍼하는 내 작은 강아지를 위해, 그 마지막에 네가 내 걱정을 하지 않도록.





+)

겨우 이렇게 다짐을 써내리면서도 울고 있으니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겠다. 그러나 쉽지 않더라도 우리 다 같이 노력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에 기꺼이 찾아와 준 이 작고 여린 동반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보다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만들어줘서 고마운 만큼, 딱 그만큼만이라도.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길이 조금이라도 더 평화롭길 바라면서.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싶은 분이라면 본문에서 언급했던 책을 추천한다. 비단 죽음뿐이 아니더라도 반려동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많은 화두를 던져준다. 불교적 사상이 진하게 묻어나는 책이므로 종교에 따라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많은 부분을 그냥 건너뛰더라도 충분히 도움될 만한 구절들을 얻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나도 종교적 상상력과 믿음이 부족해 건너뛴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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