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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Mar 29. 2020

망가진 유니콘과 맥주를 마시면

에세이 드라이브 4기: 세 번째 키워드 - 첫사랑

맞다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아니 물론 초등학교 때도 있었지.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검도복 입은 게 멋있었던 애도 있었고,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 이름이 '동화'였던 건 기억나는 애도 있고, 야 뭐 그렇게 따지자면 너 전에도 많았지. 한글 떼기 전에도 이미 좋아하는 남자애는 있었을걸. 근데 어쨌든 첫사랑이라고 하면 너야. 기준? 기준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 뭐. 내 기준...은 좀 말하기 쪽팔린 데. 아니 너한테 말하기는 좀 쪽팔리다구. 뭐 하긴, 이제 와 쪽팔리고 말고 할 것도 없나. 내가 생각하는 첫사랑의 기준은 이거야.  때문에 엉엉 울었던 밤이 있는가. 그러니까 그 전 애들은, 적어도 걔네 때문에 울었던 밤은 없는 거지. 웃지 마, 진짜야. 야, 넌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심각했어.   한마디 눈빛 하나에 그날 밤의 장르가 바뀌었단 말이야. 남자 때문에 처음 울어본다고 아마 열일곱 살 때 일기장에도 적혀있을걸. 그래서 그런 거야. 내 첫사랑이 너야.      


첫 연애랑은 다른 거지. 내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났으니까. 그새는 무슨 그새야, 너 때문에 거의 일 년을 끙끙 앓았는데. 그러고도 일 년이 또 지나서 어찌저찌 첫 연애를 했지, 너 말고 걔랑. 그러고 났더니 니가 그제서야 달려왔잖아.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한 지 2년이나 지나서 왔잖아. 그러니까 니가 두 번째 연애인 건 니 탓이지 내 탓이 아냐. 일 년 짝사랑했음 됐지 무슨 독수공방 수절하며 널 기다렸어야 했냐. 두 번째로라도 받아준 걸 고맙게 여겨. 2년이나 늦었는데. 첫사랑? 첫사랑인 건 첫사랑인 거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첫사랑은 처음이라서 특별하다는 게 무슨 개소리야. 두 번째 사랑도 처음이고 세 번째 사랑도 처음이지. 첫사랑만 못 잊냐? 사랑했던 사람들은 다 못 잊지, 첫사랑만 무덤까지 가져가는 게 말이 되니. 서운하기는, 참 서운할 것도 많다 너는.      


뭐 굳이 따져보자면 첫사랑이 제일 쎘던 것 같긴 해. 어릴 때잖아. 다들 첫사랑은 진짜 어릴 때 하잖아. 물론 열일곱 때 나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애기 아니니. 근데 그 나이에 사랑 타령을 하고 있었잖아. 감정의 진폭이 컸던 것 같아. 그런 뭐랄까, 그런 쎈 거를 처음 느껴본 거지. 처음이라서 더 컸다기보단, 그만큼 큰 걸 처음 봐서 놀란 거지. 근데 그게 너무 좋으니까, 천천히 가야 된다는 생각도 못 하고 들입다 액셀을 밟은 거야. 뒷일은 생각도 않고. 브레이크가 어디 붙어있나 생각도 안 해보고서. 지금도 사실 사랑에 빠지면 처음엔 엄청 얼얼하거든. 막 누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 같거든? 근데 이제는 경력이 꽤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엑셀 밟기 전에 안전벨트부터 매는 거야. 힘 꽉 주고 일단 브레이크 위에 한쪽 발은 올려두는 거지. 왜긴 왜야, 그러다간 다치니까. 겁이 많아진 건가. 글쎄, 니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번 데인 거지. 세상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사실 뒤에 구리구리한 게 많다는 걸 알아버린 거지. 아니,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배운 거지. 그러니까 그냥 정줄 놓고 질주하고 싶은 본능을, 쪼끔은 커버린 내가 워워 진정시키는 거야. 정신 차려, 뭘 안다고 엑셀부터 밟냐, 그러다 사고 난다. 앞뒤 양옆 잘 보고 깜빡이 켜고 들어가라, 그러면서.      




그렇다고 내가 이제 운전을 잘한다는 건 아니고. 가끔 보면 꼭 범퍼카 같아 그런 건. 범퍼카엔 브레이크가 없어. 달리다 보면 박을 수밖에 없지 서로.



슬픈 건가? 좀 슬픈가. 근데 슬퍼도 어쩌겠어. 그것도 어쩌면 어떤 종류의 성장이 아닐까. 나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 거 아닐까.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노래 부르며 춤추기엔 정신 차리고 챙겨야 할 게 너무 많아진 걸까. 모르겠어. 아니, 근데 그건 나도 그래. 너를 좋아했던 것만큼 다른 누굴 좋아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웃지 마, 별 뜻 아니거든. 그냥 그땐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랬던 거야. 아니, 감정이 가짜였단 건 아니고. 그 찌릿찌릿하던 게 어떻게 가짜일 수가 있겠냐. 손이 막 달달 떨렸는데. 근데 뭐랄까, 그때 나는 너를 엄청나게 신격화시켰었거든. 첫사랑인 데다 짝사랑이었잖아, 아주 거칠 게 없었지. 내 상상 속에서 너는 점점 더 완벽한 사람이 되어갔어.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때려 박은 유니콘. 내가 그동안 로맨스 영화와 한국 드라마에서 주입받은 느끼함을, 그러나 느끼하지 않게 꺼내놓을 줄 아는 쿨한 남자애. 원래 처음엔 다 그런 거지. 요즘은 반대야. 누굴 좋아하게 되면 단점을 먼저 찾아. 쟤랑 나랑 안 될 가능성을 생각하고, 쟤가 저렇게 잘나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러저러하지 않을까 생각해. 맞아, 데어봤으니까. 그때는 진짜 순진무구했던 거지 뭐. 얼마나 너랑 사귀고 싶었는지. 너만 가지면 세상을 다 가지는 건 줄 알았는데. 또 웃는다 너, 그만 웃어.     


응, 뭐 그건 그냥 상상이었지. 솔직히 가끔 생각하긴 했는데.... 아니, 너랑 연애를 안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니 그게 아니라, 들어봐. 너랑 연애한 게 싫었다는 게 아니고, 그냥 내 첫사랑이 짝사랑으로 남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만큼 아름다운 게 어딨니. 모르긴 뭘 몰라, 생각을 해봐. 니가 만약에 나한테 돌아오지 않았으면? 너는 그냥 열일곱 첫사랑으로 남고 나는 다른 남자들이랑만 연애를 하는 거야. 그러면 가끔 니가 생각나겠지. 왜긴 왜야, 아직 내 상상 속의 너는 완벽한 유니콘이었을 테니까. 한 번도 현실의 때가 묻지 않은. 내 남자친구가 헛소리를 할 때마다 나는 허공을 보겠지. 아, 걔는 달랐을까, 이러면서. 뭘 또 그렇게까지 얘길 해. 우린 그냥 타이밍이 안 좋았던 거지. 아냐, 니가 연애 상대로서 별로였다는 게 아니야. 그냥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 니가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1년간 부풀리고 덧대어 빚어놓은 유니콘만큼 멋있어질 순 없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그래 봐야 너도 겨우 열아홉 어린애였잖아. 나는 뭐, 그 나이니까 그런 걸 만들 수 있었던 거고. 상상에 브레이크가 없었다니까. 그리고 레퍼런스가 많기도 했지. 내가 본 로맨스 소설이며 드라마가 한두 편인 줄 아니.      


진짜 아니래두. 후회하는 건 아냐. 난 지나간 연애를 후회하지는 않아. 그냥 너는 첫사랑이었으니까, 너무 급하게 연애를 시작했던 것 같아 좀 아쉽긴 하지. 첫사랑이라고 특별하단 소리가 아냐, 얘기했잖아. 그냥 유니콘을 살려두고 싶었다고! 넌 그런 거 없어? 유니콘 만들어본 적 없다고? 웃기지 마. 됐어, 이젠 다시는 못 만들어. 그렇게 예쁜 유니콘을 만들 만큼 내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지가 않아 이젠. 세상에 유니콘이 어딨니. 그딴 거 상상해봐야 현실은 시궁창이야. 그래도 그냥 하나 갖고 있고 싶었다 왜. 소중한 추억으로다가. 아니라니까? 뭐 연애가 다 똑같지. 너랑의 연애가 특별히 거창하게 망했던 것도 아니야. 처음엔 다 신기할 정도로 좋다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멀어지잖아. 물론 서먹서먹 밀어내는 것도 있고 대판 싸우고 찢어지는 것도 있지만, 그게 뭐가 다르겠니. 어차피 서로한테 없는 사람이 되는 건데. 그렇게 치면 우리 연애는 꽤 성공적인 거 아니냐. 아니 그렇잖아. 10년인가 벌써? 11년이지. 11년이 지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있잖아. 맥주도 한 잔 하고, 첫사랑이니 뭐니 떠들면서. 로맨틱은 무슨. 사랑 사랑 해봐야 열일곱짜리들 아니었니. 나는 가끔 그때 내가 다른 사람 같거든. 지금의 나랑은 완전 다른, 어린애.      


그래? 너도 내가 첫사랑이라니 좀 다행이다 야. 아니 그냥 그렇잖아, 나만 처음이었고 그러면 좀 자존심 상하잖아. 그런 건 11년이 지나도 자존심 상하는 거거든. 유니콘은 망가졌어도 자존심은 지켜야지. 너도 첫 연애는 나 아니었으니까 쌤쌤이잖아. 어? 첫 키스? 아니 나 너 첫 키스 아니었는데. 아 왜 정색을 해. 누구긴 누구야, 참나. 이제 와서 알아서 뭐해. 걔 아니거든? 니가 모르는 애거든? 뭐야, 설마 너 내가 첫 키스였어? 아싸 내가 이겼네. 아 장난이야, 왜 이래- 됐으니까 이거나 빨리 마저 마셔. 열두 시 넘었어, 이것만 마시고 가자 빨리. 너만 휴가고 나는 내일 출근이거든. 웃기지 말고 빨랑 그거나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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