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드라이브 4기: 네 번째 키워드 - 소유자
에세이 드라이브 4기: 첫 번째 키워드 - 간판
엄마랑 또 싸웠다. 지긋지긋하기도 하지. 아무래도 코로나가 불러일으킨 연쇄작용이 아닌가 싶다. 직원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우리 회사는 벌써 한 달째 재택근무 지침을 유지 중이다. 그러니까 하루종일 집에 있게 된 게 한 달째다. 요가원도 문을 닫았고, 글쓰기 수업은 미뤄졌으며, 친구의 결혼식이 취소되었고, 자잘자잘한 약속들은 모두 'ㅠㅠ'를 남발하는 카톡 대화와 함께 사라졌다. 그게 문제다. 나는 너무 오래 집에 붙어 있었다.
물론 싸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지만 그건 그닥 중요치가 않다. 이게 아니었어도 아마 다른 이유로 곧 싸움이 터졌을 테니까. 엄마와 딸의 관계 그래프에는 결국 그런 지점들이 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거라 피할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곡선이 좀 더 완만해지고 주기도 느려졌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다. 쬐끔씩 쌓이던 것이 단숨에 폭발하는 일이다. 그 순간에 뭐가 불을 붙였느냐는 그러니까 중요치 않다. 단초는 매번 달라지지만 완전히 새로운 테마가 되지도 않는다. 둘 사이에서는 이미 여러 번 변주된 징글징글한 얘기들. 계속해서 비스무리하게, 그러나 분명히 다른 곡조로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익숙한 멜로디 위에서 엄마가 말했다. 이번에도 말했다.
"너 진짜 못 됐다"라고.
그 직전까지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쓰던 나는 결국 또 버튼이 눌리고 말았다. 안다. 이건 엄마의 습관이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저 말을 자주 썼다. 장난으로도 썼고 화를 낼 때도 썼다. 동생을 놀리느라고 '싫은데? 안 줄 건데?'하고 빙글거리고 있으면 엄마는 '아유, 못 됐다 누나가-' 했다. 다 큰 줄 알았던 사춘기 때 엄마한테 기를 쓰고 대들면 '넌 애가 왜 이렇게 못 됐니'라고 했고, 길에서 담배 테러를 당하고 상스럽게 저주를 퍼부을 때면 엄마는 눈을 약간 찡그리며 '말을 왜 그렇게 해, 못 됐어 증말' 이라고 했다. 매번 다른 뉘앙스였다. 왜 매번 다른 말로 할 수는 없었을까. 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움찔했다. 내가 왜 움찔하는지 모를 때부터 그랬다. 못 됐다는 말이 너무 싫은데 왜 싫은지 몰라서, 싫으니 그만하라고도 못하고 계속 움찔대기만 했다. 언젠가부터는 싸움 그 자체보다 그 말 한마디에 온 신경이 뒤집혔다.
참다못해 엄마에게 결국 얘기하고 말았다. 작년의 일이다. 처음으로, 나는 그 말이 싫노라고 얘기했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제발 그 행동에 대해서 얘기해달라고 했다. 못 됐다는 말은, 행동이 아니라 나 자체를 비난하는 말로 들린다고. 내가 마치 못된 성격의 소유자인 양 낙인을 쾅쾅 찍어대는 것 같다고. 그것도 아주 독점적이고 영구적인 소유자인 것처럼, 내가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소유권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처럼. 왜 꼭 그렇게 말해야 하냐고도 따져 물었다. 나는 그저 '못됨'의 일시적인 점유자일 수도 있고 잠시 잠깐 그 위로 지나가는 행인 1일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얘기하느냐고. 엄마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했지만 나는 굽히지 않았다. 너무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이 켜켜이 쌓인 것 같다고도 했다. 못 됐다는 말이 유령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뻔히 장난으로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울컥울컥, 매번 뭐가 여기서 차오른다고.
울음 섞인 호소 끝에 엄마는 그 말을 안 쓰겠다고 약속했었지만... 30년 쌓인 습관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역시 변한 건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종종 (장난으로) 그 말을 섞어 썼고, 이번에도 싸움이 시작되자 바로 그 패부터 꺼내 들었다. 못 됐다. 너 못 됐다고. 나는 원래의 싸움에 대해 잊고 그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내 온 무게를 다 실어서 거기 매달렸다. 엄마 그 말 안 쓰기로 했잖아 쫌! 제발 쫌!
휴. 거기서부터 싸움은 더더욱 감정적이 되었으며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싸웠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못 됐다'는 말에 대한 지리한 논쟁을 끝내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 뜻이 아닌 걸 알면서 억지를 부린다고. 그저 말 습관인 걸 알면서 그런다고. 맞다. 나는 억지를 부렸다. 소유자니 점유자니 떠들었지만, 그 말이 왜 그렇게 듣기 싫은지 사실 나는 아직도 모른다. 엄마의 습관이려니, 큰 뜻 없는 말이려니 하며 넘어갈 수도 있는데. 어쩌면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정말 못된 사람이라 정곡이 찔려 그런지도 모른다. 원래 팩트가 잔인한 법이다. 애써 잊고 살고 싶은 부분을 엄마가 자꾸 팩트 체크하자고 꺼내 들면 화가 날 수밖에 없지.
하여간에 우리 엄마는 결국 나한테 져주었다. 미안하다고 했고, 그 말은 안 쓰겠다고 (다시) 약속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난 이제 기대도 안 해. 끝까지 끌고 온 주제에 나는 끝까지 흥흥댔다. 이긴 티를 내야 했다. 그러고선 슬쩍, 옆으로 붙어 앉았다.
그러니까 애증이다. 애증. 사랑과 미움. 엄마와 딸 사이에 이만큼 켜켜이 들어찬 단어도 없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종종 녹이 슬고 곰팡이가 핀다. 적절히 거리를 두고 환기시켜주지 못해 곪아버리는 것들.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서로 상처를 쑤시다가도 결국 그 어드메에서 다시 끌어안고 마는 사이.
그래서 너는 엄마가 널 안 사랑한다고 생각해?
누가 그렇대? 엄마는 내가 엄마를 안 사랑한다고 생각해?
이번에도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싸우다 말고 갑자기 사랑 사랑 내뱉다 보니 기실 더 싸울 힘이 사라지기도 했고. 서로 반성과 약속과 다짐이 오갔지만 어차피 다음 상처는 다른 데서 터질 테다. 아휴. 가끔 구석구석에서 군내가 피어오르고 되도 않는 억지로 서로 상처 딱지를 뜯어낸다고 해도 어쩌겠나. 살냄새가 그리운 사이인 것을. 그저 다음에는 ‘못 됐다’는 말 만큼은 안 듣고 싶을 따름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일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