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뭘 했냐면요 1: 미드를 봤습니다
소화 님은 대체 언제 그걸 다 보는 거예요?
앗, 또 이 질문을 들었다. 왕좌의 게임 정주행을 막 끝낸 직후라, 일상의 장면 장면이 전부 그 세계관으로 연결되어 버린 탓이다. 갑자기 떠오른 장면에 신이 나서 '왕좌의 게임 보셨어요? 제가 얼마 전에 그거 시즌 8까지 정주행을 했는데요-' 하고 말문을 열었더니, 언제나와 같이 그런 질문이 돌아왔다. 아니, 맨날 그렇게 시즌 여덟 개 아홉 개짜리 미드를 어떻게 다 정주행 하냐고. 그런 건 대학생 겨울방학 때나 가능한 거 아니었냐고. 미드 얘기를 하다 보면 종종 비슷한 질문을 들었었다. 내가 마치 시간을 어디 꽁쳐두고 쓰는 양, 딴 주머니 차고 모른 척하는 양,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시간이 다 어디서 났냐고 추궁하는.
열일곱 때 가십걸로 시작하여 꾸준히 미드를 봐오기는 했다. 당시엔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플랫폼도 없어서 미드 구하기가(특히 자막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포기한 적은 없다. 아마 구글링에 이 정도 근력이 생긴 것도 다 그 덕인 듯하고. 하여간 집요하게 찾고 찾아서 보고 싶은 건 꼭 보고야 말았다.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 나 <슈츠(Suits)>, <모던 패밀리(Modern Family)> 같은 걸 몇 시즌씩 쥐고서 소중한 방학을 날려 보내고 했었지.
그래도 그땐 몇 개 안 되는, 정말 꽂히는 미드 한정이었다. 말했듯이 그냥 넷플릭스에서 쉽게 재생시킬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던지라- 그나마 한국에 팬이 좀 있으면 낫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문 사이트 구글링의 늪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 많은 우회경로와 다운로드와... 애정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구조였다. 품이 많이 드니 함부로 시작하지 않고 아주 깐깐하게 각을 쟀다. 시즌 1의 에피소드 1을 보고 파바박 느낌이 오지 않으면 그걸로 디 엔드. 미드보다는 한드 정주행에 빠져있을 때가 많았고, 무한도전을 1편부터 달렸던 여름방학도 있었고... 이렇게 쓰고 나니 어쩐지 계속해서 '정주행'의 기운은 달고 살았던 것 같지만, 하여간 딱히 미드 한정은 아니었달까.
오히려 자타공인 미드 정주행의 달인(?)이 된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다. 내 취향이 아니라고 딱 선을 그어뒀던 것이 빠지직 깨진 것이 계기였다. 분명 중학생 때 <프렌즈(Friends)>를 보고 이게 대체 왜 그렇게 유명한가 싶어 바로 손절했던 기억이 있는데, 10년 지나 무심코 다시 보니 너무 내 취향인 거라. 아마 그 당시엔 너무 어렸던 모양이었다. 구석구석 애정을 주며 시즌 10까지 정주행을 마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내가 그간 흘려보냈던 미드를 모두 재점검했다. 그렇게 정주행의 장이 열렸다.
이미 시즌을 거의 다 따라왔던 <모던 패밀리>를 다시 정주행 하는 것부터 시작해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빅뱅이론(The Big Bang Theory)> 같은 시트콤 장르에서 <에이전트 오브 쉴드(Agents of S.H.I.E.L.D.)>,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같은 장르물까지. 물론 중간중간 새롭게 등판하는 시즌 1-2개짜리 미드나 영드도 꾸준히 봤지만, 그거야 뭐 넷플릭스 깔면 다들 그 정도는 보는 거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띠용!'하고 놀라는 포인트는 내가 이미 완결된, 시즌이 10개 정도 되는 미드를 계속 한 달 단위로 주파한다는 데 있었다. 한 달만에 <프렌즈>를 주파하더니, 다음 달엔 또 <빅뱅이론>을 주파하고, 갑자기 막 <왕좌의 게임>을 다 봤다고 하고... 회사원에게 기대하기 힘든 그런 속도감.
출퇴근길에 본다. 집에서 나서는 순간 보기 시작해서 회사 문 들어설 때까지 보고, 회사 문 나올 때부터 시작해서 집에 들어설 때까지 본다. 씻고 나와서 옷 갈아입으며 보고, 저녁 먹으며 보고, 설거지하면서도 보고, 요가 가는 길에 보고, 요가하고 집에 가는 길에도 보고, 이 닦을 때도 보고 자기 전까지 본다. 일단 미드 하나를 붙잡고 이른바 '정주행'을 시작하면 나는 도통 그 세계관에서 빠져나오는 법이 없다. 될 수 있는 한 내 몸을 최대한 그리로 구겨 넣어 그 일부로 포함되고자 한다. 회사를 잘 다니고 밥도 잘 먹고 강아지 산책도 잘 시키지만, 그 외 남는 시간은 온통 미드에 털어 넣는다. 말인즉슨, 정말 필수적인 일상을 제외한 기타 다양한 여가활동은 미드로 인해 모두 중지된다. 책을 읽는 것, 예능을 보는 것, 일기를 쓰는 것, 영화를 보는 것, 가계부를 정리하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전부!
그러니 기회비용이 커다란 셈이다. 내가 꼭 유지하고 싶던 일상(특히 독서나 일기 쓰기)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는 거다. 시간과 자원이 많이 드는 일이라 여전히 시작은 조심스럽다. 웬만한 유명작들은 이미 다 본 이후라 더더욱. 출근시간 내내 넷플릭스와 왓챠를 번갈아가며 볼 만한 드라마를 찾다가 그냥 날려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심사숙고 끝에 시작을 하면, 재미있든 없든 일단은 시즌 1의 에피소드 1-3까지는 보는 것이 요즘의 원칙이다. 그랬는데도 더 이상 다음 편이 궁금하지 않으면 그건 그대로 패스. 그러나 완전히 지워버리진 않는다. 프렌즈가 그랬듯, 빅뱅이론이 그랬듯, 10년 후의 내가 다시 이 드라마를 재밌어 할 수도 있으니까.
말했듯이 제일 최근엔 <왕좌의 게임>을 정주행 했다. 이것 역시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 생각해 그간 볼 생각도 없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착각이었다. 장르를 떠나 나는 스토리와 세계관의 핍진성에 완전히 매료되는 모양이다. 아마 그 지점에서 계속 미드를 붙잡게 되는 게 아닐까. 잘 만들어진 이야기와 캐릭터의 매력은 어떤 형식을 통해서든 내 혼을 쏙 빼놓는다. 2시간짜리 영화보다, 어쩐지 매번 비슷한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한드보다, 늘 신선하면서도 충분히 길이감이 있는 미드에서 그 매력이 폭발한다. 다양한 캐릭터들의 티키타카와 관계성이 쌓이며 나를 점점 더 깊숙이 끌어당기고, 어느새 꽉 붙들어 맨다. 지루한 현실에서 잠시 탈출하여 다른 세계관으로 흡수되는 짜릿한 감각. 어질어질하기까지 한 이 느낌을 잊지 못하는 이상 아마 내 도피처는 언제나 그쪽에 있지 않을까. 일상을 담보로 해야 하니 영원히 길티 플레저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니 대체 언제 그걸 다 보냐면, 제가 그냥 잠깐 그 안에 살다 나온답니다. 강아지 산책도 잘 시키고 밥도 잘 챙겨 먹고 회사 일도 제대로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