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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Aug 30. 2020

그림을 못 그려도 계속 그리는

어젠 뭘 했냐면요 7: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젠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제도 그제도 사실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기실 그렇게 자주 그리지도 않는다. 그림 그리기는 내 취미라기보단 오래된 숙원이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에 가깝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스스로의 그림실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패배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미술 시간에도 별 흥미가 없었고 어릴 적 다녔던 미술 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사실, 내가 재능이 없다는 게 확실했으므로 흥미가 점점 떨어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잘하는 것만 계속하려고 드는 얌체 같은 애였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을 늘 동경했고 부러워했다. 어떻게 저게 저런 식으로 딱 그려지지. 옆에 똑같은 사진을 가져다 두고 그리는데 내가 봐도 내 그림은 형편없었다. 그림 그리기를 전담하는 뇌의 어느 부위가 완전히 소실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럴 거면 내 그림이 엉망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능력도 없었으면 좋았을걸. 그리는 건 안되는데 보는 눈은 또 있어서 내 그림이 별로인 건 왜 이렇게 뻔히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집에는 '손 그림 쉽게 따라 그리기'나 '초보자도 따라 그리는 일러스트' 같은 책도 여러 권 있다. 한 2년 정도의 주기로 다시금 그림 그리기를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기초는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따라 그리기 책을 보고 이것저것 베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림은 생각보다 쉽게 늘지 않았고, 내가 이 부분에 '전혀' 재능이 없다는 생각은 공고해져만 갔다. 어쩌면 그냥 내 재능은 다른 쪽에 몰빵 되어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니 그림 그리는 건 남들에게 맡기고 나는 다른 걸 찾아보자, 그런 힘 빠진 생각과 함께 여러 시도들은 언제나 포기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내가 그림으로 먹고 살 생각을 했던 게 아니라, 그저 가벼운 취미 중 하나로 그림을 갖고 싶었다는 데 있다. 먹고사는 문제였으면 진작 뒤도 안 돌아봤지. 그러나 시시때때로 남들이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해내는 걸 볼 때면, 혹은 그저 심심풀이로 이것저것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면 마음 한편이 다시 무거워졌다. 내가 뭐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닌데. 무슨 커다란 캔버스에 유화로 풍경화를 그려 전시해놓겠다든가, 그런 되도 않는 꿈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난 그냥 내가 원할 때 소소하고 작은 그림을, 그저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나한테 좌절감을 안기나. 




작년 초 아이패드를 구입하고선 다시 한번, 조금 더 본격적으로 도전해보았다. 애플 펜슬을 함께 구입했고 그림 그릴 때 편하다는 종이질감의 필름을 사다 붙였으며 '프로크리에이트'라는 그림 그리는 어플을 무려 12,000원이나 주고 다운받았다. 클래스 101에서 큰맘 먹고 꽤 가격이 비싼 온라인 강의도 -6개월 할부로- 구독했다. 준비는 완벽했다. 강의도 좋았다. 고르고 골라 선택한 초심자를 위한 강의였고 차근차근 따라가기 어렵지 않았다. 매일 밤 열심히 강의를 듣고 배운 대로 따라 그리며 숙제를 했다. 꽤나 재미도 있었다. 그림보다는 어플 자체의 사용법을 배워가는 느낌이 더 강하긴 했지만 어쨌든 뭔가를 배우는 데서 오는 엔도르핀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진도는 점점 느려졌다. 따라 그려야 하는 그림의 수준은 점점 높아졌고, 나는 선생님이 예시로 보여주는 완성작과 내가 만들어낸 (비교적 형편없는) 습작을 비교하며 다시금 좌절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러 번 연습하여 비슷하게 따라 그릴 수는 있었다. 다만 결과물이 멋있어질 뿐 내 진짜 그림 실력이 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배운 대로 그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응용해보려 하면 수준은 다시 급락하고 말았으니까. 연습량에 비해 그림 실력이 원하는 만큼 늘지 않는다는 게 명확해지자 점점 지루해졌다. 마음먹은 대로 손은 움직여주지 않았고 나는 자꾸 delete만 눌러댔다. 후. 취미로 삼고 싶었던 일인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건가.


결국 언제나와 같은 수순이었다. 프로크리에이트 앱을 켜는 빈도가 줄었다. 클래스 101에서는 마지막 남은 강의 두어 개를 기한 내 얼른 수강하라고 여러 번 알림을 줬지만 다 무시해버렸다. 무려 할부금을 다 갚기도 전이었지만... 재미가 없는데 알게 뭐람. 






너무 각 잡고 시작했던 거다. 대단한 역작을 내놓은 생각일랑 없었다곤 했지만 그러면서도 너무 멀리 보고 있었달까. 완벽주의라는 내 고질병이 또 도진 거다.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시작한 거면서 대체 그 결과물이 영 마음에 안 차는 게 무슨 상관이람. 내 강아지의 귀여움을 그리고 싶어서, 오늘 본 여행지의 특별한 풍경을 그리고 싶어서- 가끔 그렇게 글도 아니고 사진도 아닌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뿐인데. 마음속으로 생각한 그림은 대단한데 막상 손으로 그려낸 것이 그 이상향에 가닿지 않으니 자꾸만 외면하고 싶었던 거다. 바보처럼. 그저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기실 나는 이미 그릴 줄 안다. 손에 펜을 쥐고 선부터 그어나가면 된다. 당연히 잘 그리진 못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뭐든 그릴 수 있고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 아닐까. 


포르투갈에서 그렸던 그림일기를 생각한다. 잘 그린 그림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그 날 그 날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걸 색연필로 그렸다. 물론 언제나처럼 쉽지는 않았다. 도저히 깜냥이 안 되어 일부만 떼어내 그려야 하거나 조금씩 생략하고 단순화해야 하기도 했고. 내 실력으로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나 여행의 들뜸을 용기 삼아 과감하게 그냥 시작해버리기도 했다. 복잡하고 화려한 글라스데코 같은 것을, 그냥 그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리는 내내 끙끙대고도 어째 완성된 것을 보면 있지도 않은 Delete 버튼을 마구 누르고 싶었지만- 여행을 함께했던, 그림일기를 위해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준비해 온 친구의 말에 기대었다. 그림을 망쳤어도 스케치북을 뜯어내서는 안 되고, 그저 한 장 넘겨야 한다고. 얼마나 망쳤든 간에 상관없이. 그렇게 해서만 내 그림이 쌓이고 모여서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 무수한 실패와 포기를 뒤로 하고 자꾸만 다시 시도하게 되는 마음. 왜인진 몰라도 한 구석에 묘한 열망 같은 게 남아서 자꾸만 펜을 쥐게 한다. 여전히 결과물은 영 마음에 안 차지만 가끔은 그저 그리게 된다. 어플의 기능에 힘입어 사진을 대고 밑그림을 따라 그리는 꼼수를 쓸 때도 있고, 완벽한 균형의 도형을 클릭 한 번으로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니 그게 다 내 그림실력이 아니라는 건 명확하다. 여전히, 적어도 사진이라도 눈 앞에 두고 따라 그리지 않으면 손을 움직이기 힘들다. 떠오르는 대로 그린 그림은 빙글빙글 낙서로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그리고 있다. 가끔씩, 어쩌면 낙서에 불과할 그림들이어도. 마음먹은 대로 안 그려지면 어때. 새삼스럽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들이 세상에 얼마나 있다고. 똑같이 그리지 못하거나 멋지게 그리지 못해도 내 식대로 그린다. 그림 실력이 전혀 늘지 않는 것 같아도 괘념치 않으려 노력하면서. '못 쓴 자기 글을 꾸준히 견딜 줄 아는 애가 작가로 사는' 것 같다고, 한 인터뷰에서 이슬아 작가가 한 말을 끌어와 본다. 직업의 영역은 아니어도 비슷하지 않을까. 못 그린 내 그림을 그냥 꾸준히 견딜 줄 알아야, 화가는 못 되어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싶다. 아무래도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오랜만에 프로크리에이트 앱을 다시 한번 켜본다. 예쁘게 베껴 그린 그림도 많지만 결국 제일 눈길을 끄는 건 되도 않는 모양으로, 내 식대로 그저 그려놓은 어느 날의 풍경. 삐뚤빼뚤하게 그려놓았지만 여전히 내 눈엔 사랑스런 내 강아지. 그런 게 그냥 더 많이 쌓이도록 두고 싶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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