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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Aug 30. 2020

결국 첫 획을 긋는 게 중요했던 거야

어젠 뭘 했냐면요 7: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했다.

특히 색감과 붓질이 느껴지는 그림을 볼 때면 그 앞에 오래도록 서서 어떤 방향으로 붓질을 했을지, 어디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지, 만들어둔 물감이 모자랄 땐 어떻게 했을지 상상하곤 했다. 색감이나 결이 살아있을수록, 혹은 터치가 새로울수록 신기했다. 다들 좋아하는 화가라 특별할 건 없지만 한동안은 고흐의 색감의 흐름에, 때로는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에, 루소의 숲과 모네의 정원에, 보테로의 사랑스러움과 프리타 칼로의 생명감에 마음을 뺏기곤 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건 완전 다른 일이었다.

남들처럼 미술학원에 다녔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남이 그린 걸 보고 감탄하는 건 좋아했지만, 내가 하는 일이 감탄할만해지기를 바란 적은 크게 없었다. 중학교 때 미술 수행평가 점수도 그저 그랬다. 열심히는 했지만, 소질이 있는 친구들의 손짓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정작 내가 연필을 잡거나 붓을 잡으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종잡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나의 관심은 도구였다.

금속 재질 케이스에 들어있는 색연필, 끝에서부터 조금씩 짜서 쓰던 물감, 결을 잘 다듬어 예쁘게 관리하던 붓에, 연적과 벼루와 먹까지. 나는 그림 그리는 자체보다도 물통에 물을 채우고, 벼루에 먹을 갈고, 색깔별로 물감통과 색연필 통을 정리하는 걸 훨씬 좋아했다.


회사에 그림동아리가 있었다.

그림에 재능도 소질도 없었지만, 색연필과 크레파스와 물감은 좋아했던 나라서, 누군가 같이 가보겠냐고 하는 말에 선뜻 응했다. 사내 지원금을 모아 모아 재료를 구비해둔 동아리의 비품 상자는 화려했다.

“엄마는 이런 거 절대 안 사주는데!”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72색 색연필에, 온갖 종류의 물감들이 과장 조금 보태 브랜드별로 있었다. 과슈, 오일파스텔 등 처음 접하는 재료들도 있었다. 나의 그림실력은 비록 낙서 느낌에 불과했지만, 재료들을 하나씩 써보고 그 질감을 느끼며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내는 재미가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주 가끔이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가끔 여행 가면 그림일기를 그리곤 했지만 아주 이벤트성인 일일 뿐이었다. 회사 밖에 있을 때도 나만의 그림체, 나만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의 즐거움을 조금씩 알게 됐다. 회사에서 마음에 드는 질감의 색연필과 색깔을 추려내고, 낱개로 장만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여행을 갈 땐 옛날에 선물 받은 파버카스텔 12색 색연필과, 새로 산 프리즈마 색연필 세 자루를 챙겨갔다. 함께 간 친구와 리스본의 아줄레주와 트램, 포르투의 동루이스다리를 야무지게 담았다. 엉성하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었다. 획이 조금 망하면 다음 페이지에 다시 그리면 되지, 혹은 다른 부분을 튀게 만들어서, 위에 색을 덮어서 안 보이게 하면 되지, 싶은 대범한 마음도 조금씩 싹텄다.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 봤던 멋진 아줄레주. 잘못 끼워진 타일 디테일도 약간 살려 그려보았다!


그림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일들도 이런 마음, 이런 시작이 사실은 전부인 거 아닐까.

처음 한 스텝을 떼는 것, 처음 한 문장을 적는 것, 말을 한 마디 건네는 것.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감이 잘 안 오더라도 일단 한 획을 그리고 나면 다음 페이지에서 다시 시작하든, 위에 덧칠을 해보든 어떻게든 완성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요즘 주로 나의 모델이 되는 것은 나의 반려견 호두.

색연필도 좋지만 동생이 아이패드를 산 덕(?)에 아이패드로도 조금씩 그림을 그려보고 있다. 아이패드의 가장 큰 장점은 실행 취소가 된다는 것. 내가 어떤 획을 그려도 어떤 동그라미를 망쳐도 쉽게 수정할 수가 있다. 비록 아직 손에 익지 않아 호두의 얼굴과 체형은 그릴 때마다 달라지지만 그래도 좋다. 요새는 여기저기 그려둔 그림들을 모아 보는 용으로 새로운 해시태그도 만들었다. 이름하야 #호두_그림모음 . 앞으로 가득가득 채워나갈 날들이 기대된다!

아직 초라한 리스트지만, 그득그득 채워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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